[대일논단] 대전 예술 기관들이 피하지 말아야 할 과제
이응노가 일본으로 건너간 해는 1936년이다. 1925년이나 1926년쯤에는 대전에서 간판 일을 했다고 한다. 그가 지금 대전과 연고를 맺고 이응노미술관까지 세우게 된 것은 순전히 1925년 즈음의 저 인연이 계기가 되었을 터이다. 그는 1936년 이후 가와바다미술학교(川端畵學校)와 혼고회화연구소(本鄕繪畵硏究所)에서 동양화와 서양화를 배운 후 1939년부터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그림을 그렸다.
가와바다미술학교가 있던 고이시카와(小石川)는 동경의 한가운데, 천황궁과 야스쿠니 신사에서 멀지 않은 곳이지만 그가 살던 곳은 고엔지(高円寺) 지역이었다. 당시 고엔지는 동경의 외곽 가난한 동네였고, 공동묘지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 1936년경이면, 이 가난한 동네 고엔지에는 얼마 후 시인 오장환이 들어와 살게 되고, 그 몇 년 전에는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조선 청년들이 함께 합숙을 하기도 했다. 『천변풍경』을 쓴 박태원의 여러 소설에는 이 고엔지를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가 자주 등장한다. 더 확실한 근대 문명을 배워 큰 뜻을 펴고 싶었을 조선 청년들이 비용을 아끼려 모여 든 장소가 그곳이기 때문에, 그들이 전공 공부의 경계를 가르지 않고 함께 어울렸을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행위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적 생태를 품었을 사람들이라면 더말할 나위도 없다. 가령, 김동인은 이응노의 저 가와바다미술학교를 이미 오래 전에 다니면서 그 동경에서 문예지 『창조』를 편집했던 작가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역사적인 갈피들의 맥락을 모두 들춰서 새로운 피가 돌게 하는 일이 한국 예술사와 그것을 관장할 기관들의 과제라면, 그것은 지금까지 그 일들을 하지 못했던 대전의 예술기관들 역시 피해가지 말아야 할 과제이다. 요컨대 미술관은 문학관이 되어야 하고 문학사는 음악사와 미술사로 연결되어야 한다. 창의적인 발칙함 없이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 모든 예술사의 상식이다. 장르간 경계 넘기가 지역의 영토적 경계 넘기로 이어져야 하는 것도 물론이다. 가령, 이응노를 통해 같은 고엔지에서 살았던 보은의 오장환 시인을 불러올 수 있고, 그 오장환을 통해 그의 시집에 삽화를 그려준 이중섭을 불러오는 일도 가능하다. 오장환이 다닌 메이지 대학에서 공부했던 우리 지역의 시인으로 정훈이 있음은 모두 다 잘 알고 있을 터이다.
장르적 지역적 경계 넘기의 이런 사례가 너무 단편적이라면 다른 예를 들 수도 있다. 이응노는 식민지 청년으로서 일본 화단을 경험을 했으며 해방 공간의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미술단체 활동을 했다. 그보다 십여 년 늦게 태어난 시인 김수영 또한 일본 유학중 모더니즘과 연극 경험을 했으며 해방공간의 민족문학을 위한 문학단체 활동을 했다. 이들은 조선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의 배타적 경계를 넘어서는 예술작업에도 공통적으로 집중했는데, 안타깝게도 민족분단의 비극을 몸소 경험하고 있기도 하다. 이응노는 그의 아들이, 김수영은 그의 동생이 북한에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그들이 마침내 도달한 예술혼은 이응노에게는 「군중」으로 김수영에게는 「거대한 뿌리」로 표현된다. 이 공통성을 함께 모아 대전 시민에게 제시하는 일은 대전 연고 예술가를 통해 한국예술 전체를 보여주겠다는 창조적 기획으로서만 가능할 것이다.
미술이 미술 자체만으로, 또 대전문학이 대전의 문인들만으로 가능하다는 생각은 곧 도래할 자기 소멸의 전조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지역의 광역화라는 논리를 예술적으로 준비해야 할 때이다. 이 공통적 삶과 예술을 대전의 미술관이나 문학관에서 전시할 수 있는 기획 능력이 지금 대전 예술의 미래를 열기 위해 예술기관 종사자들에게는 필요한 것이다. 이로써만 대전 예술이 세계로 나아가고 세계를 대전으로 불러올 능력을 가질 것임은 물론이다. 박수연 충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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