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막] 30년 만에 되찾은 전공…게임사 대표서 바이오텍 대표로
게임업계 은퇴 후 되찾은 전공…바이오텍 대표로
“게임과 신약, 비슷한 면 많아…역량 충분히 갖춰”
“투자에 좌지우지 안 돼…M&A 활발히 이뤄져야”
‘100세 시대’라는 말이 통용되는 시대다.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3.6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일본, 스위스에 이어 세 번째로 긴 것으로 조사됐다. 이렇게 평균 수명이 늘어난 상황에서 ‘인생 2막’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 평균 퇴직 나이는 49세. 기대수명대로라면 퇴직 후에도 무려 30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도 피할 수 없고, 인생의 한 과정으로 겪어야 하는 인생 2막. 조선비즈는 인생 2막을 시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어릴 적부터 생물학자를 꿈꿨다. 재수까지 해서 서울대 분자생물학과에 진학했고, 졸업 후 대학원까지 갔다. 전공 서적만 봐도 마냥 좋았다. 하지만 석사를 밟는 중 실험실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공부는 생활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그가 유년 시절부터 좋아했던 생물학에 열정을 쏟는 이는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주변 지인들은 관심도 없었다. 기초 과학이라는 게 대체로 그랬다. 그래도 그는 공부를 계속했다.
이렇게 한눈팔지 않던 생물학도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한 건 실험실이 아닌 중앙전산실. 도서관 자리를 잡기 힘들어 대신 중앙전산실을 찾아간 게 발단이었다. 당시 전산실은 전자기기를 식히기 위해 여름에는 냉방시설까지 갖춘, 공부하기엔 최적의 환경이었다. 곧 그곳은 다른 사람들이 찾지 않는 그만의 도서관이 됐다.
그런데 어느 날 공부하러 간 전산실에서 누군가가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컴퓨터 앞에 앉은 학생은 공부도, 일도 아닌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 역시 오랜 기간 취미로 게임을 해왔던 터라 그곳에서 공부가 아닌 게임을 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게임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인 그는 순식간에 그 세계에 매료됐다. 넥슨 대표로서 국내 게임 업계에 한 획을 그은 뒤 은퇴해 현재 바이오 벤처 회사 진큐어의 대표로 인생 2막을 시작한 정상원 대표의 이야기다.
정 대표의 인생 1막은 이렇듯 우연을 계기로 시작됐다. 뒤늦게 게임의 재미에 푹 빠진 후 게임에 대한 열정은 갈수록 커져갔다. 게임에 인생을 걸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친 김에 다니던 대학원을 그만두고 컴퓨터공학과로 편입하려 했다. 학과장까지 만나 담판을 지었는데, 정작 아버지가 “또 대학이냐”라며 그를 뜯어말렸다. 결국 아버지에게 떠밀려 원치 않는 삼성그룹 공채 시험을 봤고, 그렇게 1994년 삼성SDS에 입사했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삼성SDS에서 컴퓨터를 만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분자생물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그가 맡은 업무는 대부분이 병원 프로젝트였다. 좀처럼 일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던 와중에 우연히 입사 교육을 받으며 만난 친구와 함께 사내 벤처 대회에 참가하게 됐다.
당시 삼성SDS는 사내 벤처를 뽑아 창업까지 지원해 주는 제도를 운영했다. 삼성SDS 출신인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역시 당시 이 제도를 통해 네이버 모태가 되는 웹 글라이더를 창업했다.
그 역시 야심 차게 온라인 게임 회사 창업 제안서를 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사내에서 창업까지 고민하자, 회사 일이 더 하기 싫어졌다. 2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사표를 던졌다.
평소 취미로 했던 게임을 만들기 위해 회사를 차렸다. 돈도 지식도 없었다. 회사를 지속해야 하니 기업들의 홈페이지를 만들어 주며 간신히 버티다가 고(故) 김정주 넥슨 창업자를 만났다. 정 대표는 “한국프로야구(KBO) 중계 서버 사업 입찰에 참여했는데 넥슨과 끝까지 남아 대결했었다”며 “결국 넥슨이 사업을 따냈지만, 김정주 대표가 우리 사업안을 보더니 우리에게 일을 재차 넘겼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작된 김정주 창업자와의 인연으로 본격적으로 게임 업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 당시 넥슨은 야심차게 PC 온라인게임을 개발 중이었다. 정 대표도 여기에 합류했고, 세계 최초 PC 온라인게임 ‘바람의 나라’ 탄생에 이바지했다. 정 대표는 이를 시작으로 어둠의 전설, 택티컬커맨더스 등을 개발해 2001년 넥슨 대표까지 오른 뒤 2005년 네오위즈로 자리를 옮겨 축구 게임을 평정한 ‘피파 온라인’을 내놓는다. 이후 2014년 넥슨코리아 부사장으로 친정에 복귀한 뒤 2019년 게임 업계에서 은퇴했다. 정 대표는 “넥슨은 청춘을 다 갈아 넣은 회사”라고 했다.
은퇴와 함께 게임 업계에서의 활동을 정리한 그는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서 인생 2막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인생 2막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시작됐다. 중도 하차한 대학원에서 만난 아내가 “대학에서 진행했던 실험 결과를 가져와 키워보고 싶다”는 얘기를 꺼내면서부터다. 처음에는 그저 지원 역할만 하려고 했지만, 조사차 다시 전공 공부를 시작하다 보니 사업적 가능성이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수십 년 만에 연락해 만난 대학 선후배들에게 넌지시 떠봤더니 그들 역시 가능성을 높게 샀다. 용기를 낸 그는 다시 벤처 회사 대표로 인생 2막의 첫발을 내딛게 됐다.
정 대표는 “게임과 신약 개발은 비슷한 면이 있다”며 “게임이 세계에서 성공 신화를 써 내려 온 것처럼 바이오 기업도 (세계 무대에서) 충분한 역량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조선비즈는 약 30년 동안 묻어둔 전공을 되찾아 인생 2막을 시작한 정 대표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어릴 적부터 게임을 취미로 했다. 우연한 기회로 고(故) 김정주 넥슨 창업자를 만나 게임 업계에서 일을 시작했다. 넥슨 초창기 바람의 나라 출시를 시작으로 여러 게임을 개발했고, 2001년에는 넥슨코리아 대표도 맡았다. 2004년 넥슨을 떠나 네오위즈라는 회사로 옮겨 피파 온라인도 만들었다. 여기서 게임 개발을 하다가 새로 게임 회사를 창업했는데, 이걸 넥슨이 인수하면서 자연스레 넥슨에 다시 옮겨갔다. 넥슨은 청춘이 다 들어간 회사다.”
─게임업계에 오래 있었지만, 전공이 분자생물학이다.
“사실 생물학을 좋아해 분자생물학과를 갔다. 재수까지 해서 같은 과 시험을 쳐서 들어갔다. 그만큼 좋아했다. 실험실에서 실험하고, 책만 봐도 재밌었다. 그러던 중 실생활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 하나를 찾는 게 무슨 의미인지, 주변 지인들을 만나 얘기를 해도 아무도 관심 없었다. 연구자의 길이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게 기초과학의 현실이었다.
그래도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더 재미없었다. 아버지께 석사를 그만두고 컴퓨터공학과로 편입하겠다고 했다. 학과장까지 만나서 편입 준비 거의 마친 상태였는데, 아버지가 반대했다. 그럴 거면 유학을 가던지, 컴퓨터는 회사 가서도 배우니 삼성 입사 시험을 보라고 했다.
그러고 시험을 봤더니 덜컥 삼성SDS에 입사했다. 컴퓨터 관련 업무를 할 거라고 기대했는데 분자생물학 전공을 했다니 병원 프로젝트만 줬다. 병원 내 진료 기록 같은 걸 만드는 업무였는데 생각했던 개발 업무와는 달랐다. 재미없었다.”
─본격적으로 게임업계에 몸담게 된 계기는.
“삼성SDS에 사내벤처 대회가 있었다. 회사가 직원들에게 벤처를 만들라고 하고, 창업까지 지원해 주는 제도다. 당시 회사에서 모든 구성원에게 적극적으로 참여를 독려했다. 온라인 게임 업체를 만들고 싶다고 제안서를 냈지만, 떨어졌다. 그때 붙은 것 중 하나가 네이버다.
회사를 만들려고 구상까지 해보니 더 일이 하기 싫어졌다. 그러고 회사를 직접 차려보자고 해서 친구와 창업했다. 그 당시만 해도 프로그램밍도 못 하고 돈도 없었다. 기업들 홈페이지 만들어 주는 것으로 밥벌이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국프로야구(KBO) 중계 서버를 만드는 사업이 있어 지원했고, 마지막에 넥슨과 맞붙어서 떨어졌다.
김정주 대표가 갑자기 연락이 왔다. 우리가 냈던 제안서를 보고는 좋게 평가한 것이다. 최종 선정은 넥슨이 됐지만, 실제 업무는 우리가 도맡았다. 그러면서 김 대표와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사실 당시에는 넥슨이 어떤 회사인지도 몰랐는데 게임 회사라는 것을 알고, 김 대표의 이직 제안을 받고 합류했다.”
─취미로 해왔던 게임을 일로 할 수 있다니. 흔히 말하는 ‘성덕(성공한 덕후)’ 아닌가.
“넥슨도 처음에는 2~3년 동안 버는 돈이 없었다. 첫 게임을 출시하며 한 달 300만원을 벌어 회사 직원들이 회식비를 벌었다고 자조성 발언을 할 정도였다. 적자가 누적되면서 주변에서는 ‘게임을 왜 하냐’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그러다 인터넷 시대가 왔고, 피시방이 생겨났다. PC 통신 게임에서 온라인 게임으로 전환한 것이다. 넥슨도 성장 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회사가 급속도로 성장하며 내부에서는 상장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다. 초창기 멤버였던 나에게도 일부 비난의 화살이 왔고, 같이 고생한 후배들의 비난에 동조해 2004년 회사를 떠났다.
그리고 2005년 네오위즈로 옮겨 피파 온라인을 만들었다. 네오위즈 부사장 역임 후 새로 게임 회사를 하나 창업했는데, 이곳을 넥슨이 인수했다. 자연스레 친정으로 돌아와 2019년 게임 업계를 떠났다.
─현재 대표로 있는 진큐어로 대학 전공을 찾았다.
“2021년부터 대표를 맡고 있다. 거의 30년 만에 전공을 찾은 셈이다. 여러 논문 나온 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다시 공부하고 있다. 같은 과를 나온 주변 사람을 찾아 오랜만에 인사하기도 했다. 제약·바이오기업부터 학계, 창업까지 다양한 분야로 진출해 있었다.
─진큐어는 어떤 회사인가.
“급성·퇴행성 뇌질환을 타깃으로 치료제를 개발 중이다. 아연은 신체에서 제한적 역할을 하지만, 뇌의 경우 다르다. 아연 조절이 안 되면서 생기는 뇌졸중과 같은 허혈성 뇌 손상을 주로 연구해 약물을 개발 중이며, 뇌에 아연 공급이 떨어지면 알츠하이머, 파킨슨, 루게릭과 같은 퇴행성질환도 온다. 이 중 루게릭을 타깃으로 한 신약 후보물질은 국가신약개발재단이 올해 1차로 선정한 과제에 포함됐다.
주사제 형태로 루게릭 치료제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 루게릭 환자가 약을 삼키기 힘들기 때문이다. 성공한다면 같은 퇴행성 질환인 알츠하이머와 파킨슨에서도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알츠하이머의 경우 먹는 약으로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보면 루게릭이 대부분 젊어서 걸리는 병이지만, 실제로는 55세 이상에서 가장 많이 걸리는 퇴행성 질환이다. 스티븐 호킹 같은 경우는 이례적인 케이스로, 50세 넘어 걸린 사람은 3~4년 내 목숨을 잃는다.”
─신약 개발 목표 시점은.
“항암제의 경우 시작은 상대적으로 쉽지만, 승인은 굉장히 어렵다. 기존에 있는 약보다 효과가 더 좋아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루게릭은 치료제가 없다. 그런 면에서 임상도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본다. 동물 시험에서 효과를 본 다음 독성 실험을 거쳐 대량 생산 체제도 갖춰야 한다. 빠르면 2년 내 완료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질환에 대한 약이 없는 병은 임상 2상에만 진입해도 처방할 수 있다.
국내는 환자 수가 적어 해외에서 진행하려고 한다. 하버드대에 임상 시스템이 있는데, 루게릭은 약이 없어 여기에 참여하기 위해 환자들이 보스턴에 호텔을 잡고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해외 임상이 훨씬 빠르기 때문에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 먼저 가는 걸로 생각 중이다.”
─비용적인 측면에서 어려움이 많을 것 같다. 최근 투자 환경이 좋지 않다.
“현재까지 외부 투자를 19억원 정도 받았다. 제약·바이오 벤처캐피탈(VC)중심으로 유치를 추진했는데 뇌 연구를 한다고 하니 도와줄 수 없겠다고 하더라. 많은 회사가 개발하는 항암제가 아니면 투자하기 어렵다고 했다. 가뜩이나 어려운 뇌질환 분야에서 성공한 곳도 없는데 어떻게 할 수 있겠냐는 비관론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게임업계에 문을 두드렸다. 게임사 스마일게이트가 엔젤 투자사로 나서줬다. 게임만 하던 사람이 다른 걸 하는 걸 보고, 허풍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게임과 신약 개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공통점도 있을 것 같다.
“비즈니스 자체는 비슷하다. 게임은 100개 중 1개, 약은 1000개 중 1개가 성공할까 말까다. 이렇게 성공하면 게임은 2~3년, 약은 20~30년 동안 캐시카우(수익창출원) 역할을 한다.
기술 이전·수출이나 인수·합병(M&A)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는 게임 업계와 비교해 M&A에 소극적이다. 넥슨은 던전앤파이터를 4000억원에 인수해 1조원 넘게 벌어들였다. 이 외에도 M&A 성공 사례가 여럿 있기 때문에 게임사들은 가능성만 보고 규모가 작은 회사라도 공격적으로 나선다. 반면 국내 제약·바이오 회사들은 이런 성공 경험이 없어 소극적이다.
미국 화이자의 경우 공격적으로 나서지 않나. 다만 제약·바이오의 경우 게임과 달리, 성과물까지 가는 길이 멀고 중간 과정을 확인할 수 없다는 한계점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더 VC보다는 제약·바이오 업계가 성공의 주축이 돼야 한다. 초기에 바이오산업이 상장에만 집중해 머니 게임화된 부분이 안타깝다.
중간 과정을 투자자가 체험하며 볼 수 있는 게임은 흥행 여부로 ‘잘 안됐구나’ 평가할 수 있지만, 바이오는 일반인이 판단하기 어렵다. 투자자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신기루’였다고 생각하게 되는 게 문제다. 국내 신약 개발 역량이 많이 올라온 것은 맞지만, 벤처 거품으로 너무 빠르게 샴페인을 터뜨렸다. 오히려 너무 빠르게 올랐다가 저평가된 뒤 무너지는 상태다.”
─진큐어에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게임사가 흔히 말하는 애들 코 묻은 돈으로 성장했지만, 온라인 게임을 세계 최초로 내놓았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게임사는 20조원이 넘는 회사도 있고, 콘텐츠 수출의 큰 부분을 차지하기로 한다. 바이오도 기초체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도 한국만큼 연구에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바이오도 어렵고, 힘들고, 더러운 ‘3D’로 넘어가며 연구 역량이 많이 떨어졌다.
우리나라는 양질의 연구 인력들이 배출돼 특유의 끈기로 연구 업적을 쌓고 있다. 빠르게 옥석을 가려 좋은 회사가 나와 이를 바탕으로 글로벌 회사가 됐으면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M&A를 하는 생태계도 만들어질 것이다. 바이오는 급하게 상장하거나, 외부 투자 입김으로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된다. 바이오기업은 돈이나 상장이 중요한 게 아니다. 약을 개발하면 자연스레 수익이 따라오게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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