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추석 영화 ‘빅3’가 폭망한 이유
뻔하고 매력도 없는데 왜 보나… 청산하지 않으면 청산당한다
추석 연휴 극장가에는 수확이 없었다. 최악의 기록만 남았다. 코로나 기간이던 2020년과 2021년은 제외하고 추석 연휴 사흘을 기준으로 올해 매출이 2008년 이후 가장 적었다고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했다. ‘천박사 퇴마연구소’ ‘1947 보스톤’ ‘거미집’ 등 100억~200억원대 제작비를 쓴 빅3가 모두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다.
숫자를 들추면 더 참담하다. 강동원이 주연한 ‘천박사 퇴마연구소’는 추석 연휴에 1등을 하고도 21일까지 누적 189만명(손익분기점 240만명)에 그치며 퇴마에 실패했다. 하정우가 주연하고 강제규가 연출한 마라톤 영화 ‘1947 보스톤’은 기신기신 달려 96만명에 닿았다. 송강호가 주연하고 김지운이 연출한 ‘거미집’에는 31만명만 다녀갔다.
코로나 사태로 세계의 드라마 공장이 일제히 문을 닫았을 때 한국 스튜디오들은 멈추지 않았다. 록다운(봉쇄) 없이 돌아갔고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라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만든 한국어 드라마를 세계에서 1억이 넘는 가구가 시청했고 에미상까지 받았다. 넷플릭스 창업자는 “한국이 만들면 세계가 본다”고 격찬했다.
BTS와 블랙핑크, 영화 ‘기생충’ ‘미나리’ 등 K컬처는 해외에서 선망의 대상이다. 그런데 국내 극장가는 왜 초상집인가. 통곡의 영화 리스트는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길다. 업계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가 시장을 잠식했고, 영화 관람료가 올랐으며, 묵은 영화들이 뒤늦게 개봉했다는 점 등을 이유로 꼽는다. 정말 그게 진실일까?
문제가 외부에만 있다는 건 착각이다. 밖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비즈니스에는 미래가 없다. ‘범죄도시2′와 ‘범죄도시3′는 불리한 여건을 뚫고 거푸 천만 관객을 모았다. 올해 초 비수기에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이 일본 영화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다. ‘탑건: 매버릭’ ‘아바타2′ 등 극장에서 봐야 할 매력을 가진 영화들은 건재하다.
OTT나 관람료, 묵은 영화 탓은 그만하자. 천만 영화를 3편 제작한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는 “추석 극장가의 부진은 ‘유명 배우 나오고 유명 감독이 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이 얼마나 게으르고 위험한지를 증명했다”며 “참패의 원인은 안이한 기획이고, 배우든 감독이든 세대 교체도 필요하다”고 했다. 자성하며 내부를 혁신하자는 뜻이다.
콘텐츠의 국적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시대다. ‘재미있으면 본다’는 실용주의가 대세다. 영화 ‘유령’ ‘리멤버’처럼 비장하게 접근한 항일 영화는 다 망했다. 요즘 젊은 관객은 이미 일본을 극복했다. 반일이나 ‘국뽕’은 과거와 같은 폭발력을 갖기 어렵다. 대형 상업영화의 감독이나 제작자, 투자자가 40~50대라 관성에 갇혀 있다는 게 문제다.
“이제 독자보다 작가가 더 많다”는 뼈 있는 농담을 들었다. 모든 분야에서 경쟁이 치열하다. 생성형 인공지능(AI)이 글뿐만 아니라 영상도 만들기 시작하면 콘텐츠 세계의 질서는 더 빨리 해체될 것이다. 베스트셀러 ‘시대예보’를 쓴 송길영씨는 “샘물이 있던 마을에 수도관이 깔리면 약수터의 영향력이 제한되는 것과 같다”며 “그러나 약수터 물은 수돗물과는 다른 맛과 매력이 있다”고 했다.
영화는 이제 정서적 보상을 요구하는 ‘고관여 상품’이 됐다. 편리한 OTT나 유튜브 대신에 극장을 찾아야 할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 뻔하고 매력도 없는 이야기에 왜 시간과 돈을 쓰겠나. 부진의 이유를 영화 외적인 데서만 찾는다면 재기는 더 아득한 일이 될 것이다. 흥행 공식 같은 구태부터 청산하자. 그러지 않는다면 지키려는 자가 청산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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