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무인 주문기계와 전쟁… 노인을 위한 디지털은 없다

구아모 기자 2023. 10. 23.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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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차별 받는 노인] [1] 매일 무인기계 키오스크와 전쟁
박옥순씨가 지난 16일 오후 서울 서초구의 한 주민센터에서 키오스크로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받으려다 시간이 초과돼 실패하는 모습. /남강호 기자

“다른 손님들에게 폐 끼치는 것 같아 괜히 미안해요. 밖에서 커피 한잔 즐기고 싶어 나왔다가, 주문조차 못 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럽기도 하네요.”

박옥순(68)씨는 지난 16일 서울 서초구 한 대형 커피 전문점에 설치된 키오스크(무인 주문 기계) 앞에서 두리번거렸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하기 위해 키오스크 화면을 수차례 눌렀지만, 3분 넘게 주문에 실패했다. 그가 주문하지 못하는 사이, 바로 옆 키오스크에선 20~30대 손님 4명이 주문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 박씨는 “섣불리 눌렀다가 괜히 주문이 잘못되는 건 아닌가 했다”며 “식당, 카페마다 키오스크 메뉴 디자인도 다르고, 글씨가 너무 작아 읽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했다.

17일 서울 종로구 한 커피 체인점을 찾은 김보옥(77)씨 상황도 비슷했다. 김씨는 키오스크에서 ‘SOLD OUT(품절)’이란 표시가 된 메뉴를 눌렀다. 음료를 고르는 데 성공하자, 영어로 ‘hot(뜨거운)’ ‘iced(차가운)’ 선택지가 떴다. 작은 글씨 탓에 화면 바로 앞까지 다가간 김씨는 메뉴를 고른 뒤에도 ‘담기’ 버튼을 찾지 못했다. 김씨가 키오스크 앞에서 5분 남짓 헤매자, 한 매장 직원이 “도와드릴까요”라며 다가왔다. 김씨는 “바쁠 텐데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본지는 지난 16~17일 60~70대 어르신 2명의 일상을 함께해봤다. 음식점·카페·종합병원·주민센터·버스터미널·영화관 등에서 반나절 동안 맞닥뜨린 키오스크만 7개였다. 이들은 “매일 외출할 때마다 말 한마디도 나눌 수 없는 기계와 씨름을 하는 기분”이라며 “키오스크 때문에 마음 놓고 외출하기가 두렵기도 하다”라고 했다.

그래픽=김의균

키오스크를 사용하는 매장은 최근 급증했다. 일상이 디지털화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1000만명에 육박하는 65세 이상 ‘실버 세대’는 디지털 일상에서 소외돼가고 있다.

서울디지털재단이 작년 6월 발표한 ‘디지털 역량 실태 조사’에 따르면, 65~74세의 29.4%만 키오스크를 이용해 봤다고 했다. 75세 이상의 키오스크 이용률은 13.8%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55세 미만 이용률은 94.1%였다. 고령층은 ‘사용 방법을 모르거나 어려워서(33.8%)’, ‘뒷사람 눈치가 보여서(17.8%)’ 키오스크를 이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국내 키오스크 운영 대수는 2019년 18만9951대에서 작년 45만4741대가 돼 3년 만에 2배 이상으로 늘었다. 이 중 카페, 음식점 등 요식업 부문은 같은 기간 5479대에서 8만7341대가 돼 약 16배로 급증했다. 하지만 노인들 대다수는 디지털 서비스의 편리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키오스크,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 사용에 서툴 뿐 아니라 기기 사용 방법이 복잡하거나 글씨가 작아 노인 친화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본지 기자와 지난 16일 서초구 일대에서 일상생활 공간을 함께다녔던 박옥순씨는 반나절 동안 4개의 키오스크를 맞닥트렸다. 박씨가 카페에 들른 뒤 점심을 먹기 위해 찾은 햄버거 프랜차이즈 매장은 키오스크로만 주문을 받았다. 키오스크 앞에 선 박씨는 광고 화면이 나타나자 화면에서 어디를 눌러야 할지 몰라 1분가량 가만히 서 있었다. 박씨는 “화면에 메뉴 정보가 빼곡히 적혀 있어서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찾는 데도 한참 걸렸다”고 했다.

박씨는 가족관계증명서를 뽑기 위해 들른 주민센터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키오스크를 이용하던 도중 두 차례 ‘입력 시간이 초과됐다’는 이유로 키오스크가 초기 화면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박씨는 “잘못 누르면 어떻게 하나 싶어 꼼꼼히 보는데, 시간이 금방 넘어가서 이렇게 됐다”고 했다. 박씨가 주민센터 직원에게 서류 발급을 부탁하지 않은 이유는 무인 민원 발급기 비용이 저렴하기 때문이다. 무인 민원 발급기를 통해 발급하면 500원이지만, 동사무소 직원에게 발급받으면 2배인 1000원을 내야 한다. 박씨는 “한 푼이 아쉬운 노인들은 이런 비용도 아껴야 한다”고 했다.

키오스크 확대로 인한 디지털 격차로 노인들이 부담해야 할 돈도 많아졌다. 과거엔 매장 직원의 도움으로 할인 혜택을 받곤 했는데, 키오스크를 사용할 땐 할인받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키오스크엔 카드사, 통신사별 할인 혜택 정보가 나오는데 키오스크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노인들은 이 할인 혜택을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보옥씨가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키오스크로 음료를 주문하다 ‘SOLD OUT(품절)’이라고 적힌 메뉴를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남강호 기자

17일 서울 종로구 일대를 다닌 김보옥씨 상황도 비슷했다. 김씨는 “자식들이 표를 예매해주지 않으면 영화 한 편 보기도 어렵다”고 했다. 김씨가 종종 들르는 서울 탑골공원 인근 한 대형 영화관은 상영관이 6개인데, 매점에서 간식을 만드는 직원 한 명만 있을 뿐 매표소엔 직원이 없었다. 영화표, 간식 모두 키오스크를 통해 사야 했다. 김씨는 영화 예매를 하려 했지만 글씨가 작아 좌석을 고르는 데 애먹었다. 화면엔 직원을 부를 수 있는 버튼이 없었다. 김씨는 “노인들이 많이 찾는 탑골공원 근처지만, 키오스크가 점령한 지 꽤 됐다”고 했다.

대형 종합병원, 대학 병원은 ‘접수 등록’ ‘진료실 도착 알림’ ‘병원비 수납’ 등이 모두 무인 기계로 진행됐다. 심장 정기 검진을 위해 서울 서대문구 한 병원을 찾은 김씨는 “기계로 접수하세요”라는 병원 직원의 안내에 따라 무인 기계로 접수를 마쳤다. 로비는 노인들로 북적였는데, 대부분 같이 온 사람들의 도움으로 수납 절차를 밟고 있었다. 김씨는 “이런 기계들이 젊은이들에겐 빠르고 편할진 몰라도, 익숙하지 않은 노인들에겐 고역이다”라고 했다.

택시 호출 서비스 애플리케이션이 보편화되면서, 밤마다 택시를 잡지 못해 거리를 헤매는 노인도 적지 않다. 30년 넘게 개인택시를 운영하다가 은퇴한 김씨는 최근 몇 년 동안 밤에 택시를 타본 적이 없다고 한다. 앱으로 택시 호출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김씨는 “앱이 도입되고 나서 기사들도, 손님들도 더 편해졌다고 하지만 이젠 길가에서 손을 흔들어선 택시를 따로 잡을 수가 없어 노인들이 밤에 택시를 잡기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라고 했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키오스크 전면 도입으로 노년층이 심리적 위축을 겪는 만큼 현재의 디지털 격차를 고려한 지원 방안이 필요하다”며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기기와 친숙하게 자란 세대와 달리, 디지털 문법이 낯선 고령층은 화면을 ‘터치’하는 방법부터 가르쳐주는 등 세밀한 교육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픽=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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