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 영화는 되고 드라마는 안 된다? 같은 촬영장인데…
같은 촬영 노동이지만 영화는 ‘근로계약서’, 드라마는 ‘용역계약서’… 여성 촬영감독 극소수에 채용 성차별도
촬영팀 스태프로 일하는 유진(20대·가명)씨는 영화 관련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견습생’ 일을 시작했다. 몇몇 현장에는 견습생 제도가 있는데, 인턴으로 일하는 것처럼 업무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일을 시켜보는 단계다. 그렇게 유진씨는 일주일간 무급으로 일한 뒤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아무래도 남자를 뽑아야 할 것 같다’는 이유였다. 24살, 졸업 뒤 경험한 첫 번째 채용 성차별이었다. “제가 일을 전혀 모르니까, 바로 쓸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 그렇게 변명한 것처럼 들렸어요. 그래서 다음 현장에서는 일을 열심히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유진씨는 불합격 통보를 받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 일을 찾았다.
‘아무래도 남자 뽑아야 할 것 같다’
촬영팀 막내로 일하며 유진씨는 잡다한 일을 도맡아 했다. 연출감독이 보는 모니터 관리, 각종 장비의 배터리 관리, 촬영팀과 다른 팀의 소통, 촬영감독이나 선배들이 지시하는 설정값을 맞추는 일까지. 카메라가 꺼지고 나서 돌아가기 전까지 유진씨는 숨 가쁘게 움직이다가 촬영이 시작되는 순간 잠시 숨 돌릴 틈이 생긴다. 세팅하기 위해 널브러져 있던 장비들을 정리하며, 잠깐이나마 더위를 피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유진씨는 촬영감독이 어떤 구도로 이 장면을 담는지, 선배들은 설정값을 어떻게 맞췄는지, 어깨너머로 보며 공부하는 순간이 재미있다고도 했다.
“촬영감독님을 보면 고려해야 하는 게 엄청 많아요. 이 장면을 찍을 때, 다른 카메라 장면이나 앞뒤 장면과 편집상으로 이어 붙일 수 있을지도 생각해야 하고요. 그래서 카메라A는 인물의 오른쪽, 카메라B는 뒤, 이런 것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면서 찍으시더라고요. 이전에 촬영한 장면과의 연계도 중요해서, 찍은 것도 기억해야 하고. 어렵지만 재미있는 일인 것 같아요.”
유진씨는 몇 년 동안 촬영팀 스태프로 일하며 안 가본 곳이 없다고 했다. 산에서 촬영하는 날도, 호텔에서 촬영하는 날도 있었다. 그중 가장 열악했던 장소는 한여름의 실외 촬영이었다. 좁고 낡은 건물의 계단에서 촬영하던 날이었다. 창문도 없는 공간에 많은 사람이 들어가 촬영하면 뜨거운 공기 탓에 마치 샤워한 것처럼 금방 땀범벅이 된다. 각종 장비와 사람의 열기가 빠져나가지 못한 채 공간을 꽉 채운다. 숨이 꽉 막히는 순간이지만, 그렇게 집중해서 좋은 장면이 나오면 고생이 보답받은 기분이 든다. 가장 힘든 순간과 가장 즐거운 순간이 교차하는 타이밍이다.
오히려 불편한 순간은 이런 물리적 이유가 아닌, 사람 때문에 자주 생긴다. 해변가 장면을 촬영하는 날, 수영복을 입고 촬영하는 여성 배우들을 보고 남성 스태프들이 자기들만의 농담을 했다. 유진씨는 그 상황을 피하지도, 그렇다고 그 대화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자리를 지켜야 한다. 이럴 때면, 여성의 신체를 소비하는 자극적인 장면이 꼭 필요할까 생각도 든다.
영화와 드라마의 차이
“처음에 인터뷰를 제안하셨을 때, 제가 인터뷰해도 될까 생각했어요. 그래도 기술팀은 다른 팀보다 나은 상황이니까요.” 무엇이 더 낫냐는 질문에, 유진씨는 ‘그래도 주 52시간은 지켜서 다행’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드라마 촬영현장이 주 52시간 노동을 편법으로 지키고 있다. 2022년 드라마 <미남당>(KBS)의 스태프들이 고발하며 알려진 것처럼, 촬영장 대부분이 하루 13시간씩 나흘을 찍는다. 고용노동부의 근로감독 결과를 보면, 당시 연장근로시간제한(주 12시간)을 위반한 주차가 30주 중 21주나 됐다. “저도 처음에 듣고 많이 놀랐어요. 당연히 법을 지키면서 촬영하겠지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이는 영화와 드라마 촬영현장의 가장 큰 차이이기도 하다. 유진씨는 영화와 드라마 현장 모두 참여해봤는데, 같은 일을 하는데도 영화를 만들 땐 근로계약서를 쓰고 드라마를 만들 땐 용역계약서를 썼다. 당연히 시간적 여유도 달랐다. 드라마를 촬영할 땐 새벽 늦게 퇴근했다가 잠깐 세수만 하고 다시 출근하는 일이 잦았다. “영화 촬영 중 무거운 걸 옮기다가 팔목을 다쳤어요. 그때는 4대 보험이 적용됐으니까 산업재해 처리를 했는데, 아마 드라마였으면 (산재 처리가) 안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해요.” 유진씨는 영화 촬영과 드라마 촬영을 모두 해보니 다시 드라마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저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일해보니까 다른 것 같아요. 적어도 촬영 사이에 8시간 정도는 쉴 수 있었으면 좋겠고, 일 말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조금씩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공부도 더 하고 싶고요. 그런데 항상 시간이 부족하네요.”
유진씨가 바라는 ‘워라밸’은 소박했다. 최소한의 삶을 꾸리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다. 잠자고 밥 먹을 수 있는, 나를 돌보고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그래도 점점 나아지겠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해보려고요.”
여성 촬영감독이 늘어나는 미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영화관에서 처음 봤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파도치는 청록색 바다, 서로를 응시하는 두 여성, 모닥불을 둘러싼 여자들. 영화의 모든 순간이 그림이었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 대해 더 알아보니, 주요 스태프 80%가 여성이었다. 여성 감독, 여성 스태프를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유학 가서 촬영 공부를 더 하고 싶어요. 그래서 틈틈이 외국어 공부도 하고 있어요.” 유진씨는 쉬는 시간에 유튜브를 보며 영어를 공부한다. 좋아하는 영화의 촬영감독들이 다녔던 학교들을 찾아본다. 대체 어떤 공부를 하면 이런 장면을 만들 수 있을까 궁금해하며 돈을 모아 유학 갈 날을 생각한다. 언젠가 유진씨가 대한민국의 열 번째, 스무 번째 여성 촬영감독이 되어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바라본다. 유진씨가 셀린 시아마 감독이나 클레르 마통 촬영감독처럼 또 다른 여성들의 롤모델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박혜리 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동조합 희망연대본부 조직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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