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공을 아래로 내려놓아라 [삶과 문화]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흥민이) 절대 월드클래스 아닙니다."
전 세계 축구인이 인정하는 월드클래스 축구 선수 손흥민. 그의 야박한 아버지 손웅정 선생이 인터뷰에서 했던 유명한 말이다. 기본기와 겸손함과 사람됨을 늘 강조하는 그는 놀랍게도 한 해에 100권 넘는 독서를 한다고 한다. 책을 읽다가 좋은 부분을 만나면 그 부분을 접어서 아들에게 읽혔다. 이런 성장 배경이 손흥민을 그가 가진 축구 실력에 전혀 모자람이 없는 인성을 갖춘 '좋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손웅정 선생이 쓴 책을 읽다가 중국 고전 중 '열자'를 소개하는 부분이 있어서, 문제의 월드클래스 발언의 실마리가 될 만한 구절을 찾아냈다.
송나라 재상이 공자를 뵙고서 선생님이 성인이냐고 묻자, 공자가 다음처럼 겸손한 답을 했다. "내가 감히 어찌 성인이 되겠소? 나는 다만 널리 공부하여 많이 아는 사람일 뿐이오."
수만 명이 꽉 들어찬 피치에 서 있는 기분은 어떤 걸까? 둘러보면 누구 하나 만만한 선수가 없고, 막상 상대해 보면 허술한 팀도 드물다. 나에 대한 믿음은 주변에 가득한데, 기회는 생각보다 적다. 골은 넣고 보면 쉬운 일 같지만, 둥근 볼은 내 뜻대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 골문 앞에서 골을 잡은 찰나의 순간에는 간절한 바람, 골키퍼와 골대 사이의 협소한 공간, 영웅이 되고 싶은 욕망, 기대만큼이나 더 과하게 들어가는 힘, 그리고 행운이 복합적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저렇게 다 큰 어른들이 골 하나의 기적에 슬라이딩하고, 춤을 추고, 하트를 날리고, 얼싸안고 하는 것이다. 손흥민은 올시즌 그의 소속팀 토트넘 홋스퍼의 주장이 되었다.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인 주장. 초반의 부담감을 이겨내고 잘 해내고 있다. 그의 친근한 통솔력에 팀이 하나가 되어 무려 리그 순위 1위에 등극했다.
소속팀의 감독도 바뀌었다. 손흥민이 이 팀에서 만난 5번째 감독이다. 현대 축구가 감독 놀음이라는 말처럼, 호주 출신 포스테코글루(Ange Postecoglou)라는 감독이 이 팀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 같다. 부임 초, 그의 실력을 잘 모를 때는 빅리그 경험이 없는 축구 변방 출신이라는 점이 우려스러웠고, 이름도 발음하기 힘들었다. 축구를 잘하다 보니 그의 이름 안에 포항공대가 들어있어서 왠지 친근해 보이고 똑똑하게 느껴진다. 그간 손흥민을 보는 재미로 프리미어리그 중계를 봤다면, 지금은 감독이 추구하는 '공격 축구' 자체를 보는 재미가 확실히 생겼다. 몸매로만 보아도 역대 토트넘 감독 중 가장 후덕해 보인다. '모든 책임은 감독에게 있다'는 인터뷰를 보면 리더가 해야 하는 일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인 것 같다.
포스테코글루의 아버지는 그리스 사람이다. 그의 아들이 다섯 살 무렵, 아들의 행복을 위해 호주 멜버른으로 이주를 했다. 평범한 노동 계급이었던 그는 시간이 나면 지역의 축구를 보러 갔고, 주말 밤이면 자는 아들을 깨워 텔레비전으로 영국 축구를 같이 봤다. 공격 축구의 상징 리버풀의 엄청난 팬이었다. 우리나라와 호주의 시차가 비슷하니 우리가 유럽 축구를 힘들게 보는 심야 시간과 비슷했을 것이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혔듯, 스포츠에서 중요한 것은 승패라기보다는 연결의 경험이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경험했듯 스포츠는 사람과 사람, 도시와 도시, 국가와 국가를 연결하고 부모와 자식 간을 연결했다. 포스테코글루는 그의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와 얽힌 중요한 순간을 얘기한 적이 있다. 지역 고등학교에서 가장 발전한 선수로 선정되어 트로피를 받아왔던 날의 일화다. 축구공이 아래에 붙어 있고, 손잡이가 있는 컵이 위에 있는 형태의 트로피였는데,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공을 제대로 잡고 밖으로 공 차러 나가자"
순위, 우승컵, 월드클래스 같은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축구 자체에서 행복을 느끼라는 가르침이었다. 손흥민이 받아오는 상이나 트로피를 잘 안 보이는 곳에 넣어둔다고 했던 손웅정 선생의 인터뷰와 일맥상통한다.
영국 축구 기사를 보면 멋진 골을 보고 'clinical'이라는 형용사를 쓴다. 의학에서 얘기하는 '임상적인'이란 뜻이 아니다. '빼어나고 정교하게 행해진'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임상의사(clinician)도 말과 손으로 빼어나고 정교한 행위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묘한 동질감과 책임감을 느낀다.
오흥권 분당서울대병원 대장암센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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