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고통은 장벽으로 분리될 수 없다

정유진 기자 2023. 10. 22.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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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 소녀 라하프가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부서진 건물 잔해 속에서 그림책을 챙겨들며 말했다. “살면서 여러 전쟁들을 겪어왔어요. 저는 그때도 어렸지만, 지금도 여전히 어려요. 2009년에 태어났거든요. 그래도 제가 겪은 전쟁들 중에서 2014년과 이번 전쟁이 가장 무서운 것 같아요. 이번 전쟁은 정말 무서웠어요.”

국제팔레스타인아동보호연맹(DCIP)이 이 영상을 찍은 2021년에 라하프는 고작 열두 살이었다. 세 번의 전쟁 속에서도 무사히 살아남아 올해 열네 살이 됐을 라하프는 현재 생애 네 번째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그가 가장 무서웠다고 했던 2014년·2021년 전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전쟁을. 15분마다 한 명꼴로 어린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 가자지구의 ‘킬링필드’ 한복판에서 라하프는 아직 살아 있을까. 비처럼 쏟아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미사일 속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아, 다시 다섯 번째 전쟁을 겪게 될까.

이스라엘 남부 니르오즈에 살고 있는 84세 여성 디차 하이만은 지난 7일(현지시간) 마을을 습격한 하마스 대원들에게 납치돼 가자지구로 끌려갔다. 하이만은 군인도, 시오니스트(유대 민족주의자)도 아니었다. 아이들을 돌보는 사회봉사 활동을 하면서 여생을 평온히 보내고 싶어 했던 평범한 노인일 뿐이었다. 그와 함께 인질로 납치된 이웃 중에는 유대인 정착촌 확장에 반대하고 두 국가 해법을 지지하는 시민단체 ‘피스 나우’의 활동가도 포함돼 있었다. 하마스는 민간인을 공격해 1400여명을 닥치는 대로 죽였고, 여성들을 전리품처럼 끌고 갔다. 현재 가자지구에 억류된 인질은 200여명에 달한다. 하이만은 살아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16일째에 접어들었다. 전쟁의 참상을 전하는 기사마다 댓글은 양분돼 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와 무차별 공습으로 ‘생지옥’이 된 가자지구의 비극에 대해 이야기하면 하마스가 한 짓을 잊었냐고 한다. 하마스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이야기하면 이스라엘이 그동안 저질러온 짓을 생각할 때 하마스를 비판해선 안 된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모든 도덕적 경계가 무너지는 야만의 시대에서도 흔들리지 말아야 할 단 하나의 상수는 전쟁범죄가 전쟁범죄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엔 통계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2008년부터 이번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가자지구와 네 차례 전쟁을 벌이며 64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을 살해했다. 사망자 대다수는 여성과 어린이였다. 같은 기간 사망한 이스라엘인은 308명에 불과했다. 전쟁이라 부를 수도 없는, 일방의 학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마스의 이스라엘 민간인 도륙을 ‘저항운동’이라 부를 수는 없다. ‘어쩔 수 없는’ 전쟁범죄가 들어설 틈을 주는 순간, 인간은 영원히 탱크를 이길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이와 같은 이유에서, 더욱 큰 목소리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와 무차별 공습의 즉각 중단을 요구한다. 현재 가자지구의 사망자는 4400명에 육박하고 있다. 이미 이스라엘 측 사망자 1400여명을 3배 이상 넘어섰다. 전쟁범죄를 더 큰 전쟁범죄로 덮고 있는 꼴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지난 네 차례의 전쟁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생명이 이 한번의 전쟁으로 희생될 위기에 놓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스라엘 극우 정치인은 하마스 지휘소가 가자시티 알시파 병원 지하에 있다면서 병원을 폭격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입에 담고 있다. 하마스를 궤멸시키기 위해,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 전체를 청소하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이스라엘 극우 세력은 아직도 깨닫지 못한 것 같지만, 이번 전쟁이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준 사실은 고통은 장벽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마스에 인질로 잡혀 있는 하이만의 딸은 CNN 인터뷰와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에 기고한 글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너무 걱정되고, 엄마를 납치한 하마스에 분노한다. 하지만 나는 이스라엘 정부에도 분노한다. 지난 20여년 동안 이스라엘 정부는 분쟁을 종식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가자지구에 얼마나 많은 미사일을 쏘든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 큰 폭력만 불러올 뿐이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말한다. 가자지구를 파괴하지 말라.”

우리는 이러한 목소리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가자지구의 무고한 주민과 평화를 원하는 이스라엘 주민의 편에 서야 한다. 물과 식량, 연료, 의약품 반입이 가자지구에 차단된 지 벌써 2주가 흘렀다. 시간이 없다.

정유진 국제부장

정유진 국제부장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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