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해물찜’ 같은 출판은 없을까
서점 한복판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다. 10여년 전이었고, 서점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며 집중적인 주목을 받던 다이칸야마 쓰타야에서였다. 예쁜 사진책도 사고 멋진 서점 구경도 할 겸 가벼운 마음으로 친구와 함께 떠난 일본 도쿄 여행의 첫날, 나는 한숨을 쉬며 쓰타야의 매장 한가운데를 맴돌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쓰타야는 멋진 서점이다. 공간의 배치와 서가의 구성, 책의 선별, 다른 라이프스타일 상품과 책을 함께 배치하는 솜씨가 모두 놀라웠다. 하지만 내가 두려워한 것은 공간의 규모에 비해 책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대형 서점의 10분의 1이나 될까. 서가에 있는 책들 상당수는 책등이 아니라 표지를 앞으로 한 채, 우산이나 가방, 문구류 등과 함께 놓여 있었다.
편집문화실험실 장은수 대표는 특강에서 출판사와 대형 서점이 일종의 맹약을 맺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즉 출판사가 책을 출간하면, 서점은 이를 매장에 입고한다. 이것은 꽤 중요하다. 판매 금액을 추후에 정산하거나 팔리지 않는 책은 반품하더라도, 출간된 책은 독자들의 눈에 노출될 기회를 받는다. 이 맹약 때문에 기노쿠니야 서점이나 교보문고와 같은 전통적인 대형 서점에는 놀랄 정도로 많은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다.
하지만 쓰타야는 완전히 달랐다. ‘잘 만든’ 책만 골라서 다른 상품들과 함께 진열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대형 서점에 비해 아주 적은 책만 비치하면 된다. 그리고 선별된 ‘북 큐레이션’을 통해 방문객들에게 ‘경험’을 제공하고, ‘취향’을 판매한다. 한국의 크고 작은 서점들이 대부분 쓰타야를 배우려고 하던 시절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만들던 투박한 책들은 서점들에서 문전박대를 받게 되는 걸까. 나는 이 상황이 지나치게 잔혹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언제부터 ‘취향’과 ‘경험’을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일까. 이 단어들을 입 밖에 내기 조금 민망해하던 시절도 있었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광범위한 조사연구를 통해 한 개인의 취향에는 계급적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위계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였다. 취향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각자가 지닌 문화적 자본을 바탕으로 경쟁해서 형성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물론 지나치게 결정론적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취향’이라는 말이 계급과 자본을 비롯한 많은 것을 은폐하는 것처럼 들리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함께 갔던 친구는 이런 나의 말에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요식업으로 잔뼈가 굵은 그는 어차피 경쟁은 모든 분야에 존재하고, 아무리 작은 음식점이라 하더라도 그런 ‘취향’과 ‘경험’을 의식하지 않는 곳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친구는 맥줏집에서 분식집, 세련된 카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장을 성공시키며 승승장구했다.
그때로부터 10여년의 시간이 흘렀고, 나는 제주도로 귀향한 그를 만났다. 나름대로 친구는 꽤나 지쳐보였다. 장사 잘되냐고 묻자 그는 고달프다며 하소연을 했다. 요즘은 예전처럼 ‘단골 손님’이란 개념이 거의 없어. 다들 카페 하나를 ‘경험’한 다음에 다른 카페를 또 ‘경험’하러 가. 그래서 모든 걸 다 해야 해. 간판부터 메뉴, 그릇, 안내 문구 하나하나까지 정말 다 신경을 써야 해.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 나는 직장을 그만두었고, 꽤 예쁘고 세련된 책들을 만드는 출판사를 열었다. 실제로 다이칸야마 쓰타야에서 주문을 해온 적도 있다. 하지만 조금은 피로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나의 친구처럼. 나 해물찜 집 하려고. 친구는 말을 이어갔다. 그의 생각에는 해물찜은 깔끔하게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취향’과 ‘경험’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는 것이다. 조금 더 일찍 수산시장에서 장을 봐서, 신선한 해물을 더 많이 주면 되는 ‘정직한’ 장사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그러게 말야. 해물찜 같은 출판은 어떤 게 있을까? 나는 친구와 머리를 맞대고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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