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권의 손길] 이태원 참사 고통 곁에 서기
정부 외면 속에 이태원 유가족은
사실상 국가 없는 사람들이 돼
이젠 동료 시민으로서 내 차례다
‘세상 떠난 이들 위해 진실 규명’
다짐이 있음을 전해드리고 싶다
기사 제목이 눈길을 끈다. “이태원 참사 해외 다큐멘터리 나왔다…한국에선 시청불가 상태.” 정말 볼 수가 없나 싶어 다큐멘터리 제작사의 자체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를 찾아가 클릭해 본다. ‘404 오류’ 메시지가 뜨고 영상은 재생되지 않는다. 404 오류는 사용자가 사이트에서 존재하지 않는 URL(인터넷상의 파일 주소)을 탐색했을 때 표시된다. 부질없이 다시 한번 클릭해 본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같은 오류 메시지만 반복된다.
우리 정치도 그랬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아직 제대로 사과한 이조차 없다. 모두가 여전히 책임을 회피하기 바쁘다. 아무리 ‘책임’이라는 버튼을 클릭해도 제대로 이 참사에 응답하는 이들은 없다. 그저 제대로 막을 수 없었던 ‘사고’라 둘러대기 바쁘다. 담당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책임을 물으니 “이미 골든타임을 지난 시간이었다. 제가 그사이에 놀고 있었겠냐”고 되받아친다. 이처럼 우리 정치 역시 ‘404 오류’ 상태다. 아니 적어도 이 문제와 관련해선 ‘무정부 상태’다.
‘404 오류’ 메시지 앞에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다 책 한 권을 찾아본다. 애덤 스미스가 쓴 <도덕감정론>이다. 대학원 시절, 정치학 전공자이면서도 정치와 사회를 한참 불신하던 때 이 책을 우연히 만났다. <국부론>의 저자이기도 한 스미스는 이 책을 이렇게 시작한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낀다.”
스미스는 말한다. “우리가 타인의 몸에 들어가 어느 정도 그와 동일한 사람이 되고, 심지어는 타인의 것과 유사한 감각을 느끼고, 이러한 방식으로 타인의 고통이 우리 자신의 것이 될 때 우리는 타인이 느끼는 고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전율하게 된다”고. 스미스는 이런 능력을 ‘공감’(sympathy)이라 부른다.
더하여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심지어 죽은 사람들과도 공감한다”고. “그들이 이 세상의 햇빛을 빼앗기는 것, 더는 우리와 생활하고 대화할 수 없다는 것, 이 세상에 그들을 생각해 주는 사람이 더는 없고, 얼마 안 가서 가장 친한 친구들과 친척들의 애정으로부터 잊혀지고, 그리고 기억에서 거의 망각되어 버린다는 것”, 이 모든 것에 슬픔을 느낀다고.
이런 이유로 스미스는 확신한다. “우리가 그렇게 무서운 재난이나 비극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에 대해 아무리 공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지나치다 느끼지 않는다”고. “이렇게 우리가 함께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동료라는 감정’(fellow-feeling)을 느끼는 원천”이라고. “불행한 일에 처한 이들일수록 자신의 비통함에 공감하는 사람을 찾았을 때 매우 큰 위안을 얻는다”고.
이 구절이 가슴에 들어오자 동료 시민들이 달리 보였다. 이들은 ‘나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사람들’, ‘내가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었다. 그 이후 고통을 외면하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신뢰를 잃을 때면 이 책을 열어본다.
어느새 이태원 참사 1주기가 다가온다. 돌이켜보면 세월호 참사가 아직 10년도 지나지 않았다. 그사이, 또 막을 수 있었던 참사로 159명의 동료 시민들을 잃었다. 게다가 두 차례 모두 너무 젊은이들이 많았다. 이태원 참사만 해도 149명이 10대, 20대, 30대였다. 이런 창창한 아이들을 떠나보낸 부모들은 남겨진 자식들의 휴대폰을 아직 끄지도 못한다.
그런데 국가는 응답이 없다. 사고의 진상을 규명하는 일조차 제대로 시작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가족이 대통령에게 참사 1주기 시민 추모대회에 참석해 유족의 고통을 위로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정부의 외면 속에 유가족들은 사실상 국가 없는 사람들이 돼 버렸다.
그렇다면 이제 동료 시민으로서 나의 차례다. 어떤 말로 고통을 나눌 수 있을지 모르지만, 참사로 인해 고통받는 모든 이들의 곁에 가만히라도 함께 앉고 싶다. 여기 고통을 함께하는 많은 우리들이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알려드리고 싶다. 그리고 여기에 이렇게 다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전해드리고 싶다.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진실을 규명하겠다’고, ‘참사와 관련 있는 이들이 반드시 책임을 지게 하겠다’고, ‘다시는 그런 참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기억하겠다’고, 무엇보다 ‘세월호 때 했던 이 지키지 못한 모든 약속을 이번에는 지켜보겠다’고.
“사람을 유쾌하게 만드는 사랑과 기쁨의 격정은 아무런 부수적인 기쁨 없이도 우리 마음을 만족시켜 주고 지지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슬픔과 분노라는 고통스러운 정서는 공감으로 위로받아 치유되어야 할 절실한 것이다.”
스미스가 우리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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