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칼럼] ‘정파적 언론’의 황혼

한겨레 2023. 10. 2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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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정당 소속의 국회의원이자 그 정당의 선전과 홍보를 책임지는 보직을 맡은 사람이 유력 일간지의 논설위원을 겸해도 괜찮은가? 오늘날엔 모든 사람들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냐?"고 비웃겠지만, 적어도 1950년대까지의 한국 언론계에선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그 덕분인지 언론의 정파성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정파적 언론의 전성시대는 영원할 것처럼 보이지만 소통을 죽이는 그 내재적 모순으로 인해 머지않아 황혼을 맞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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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칼럼]

언론인. 게티이미지뱅크

강준만 I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특정 정당 소속의 국회의원이자 그 정당의 선전과 홍보를 책임지는 보직을 맡은 사람이 유력 일간지의 논설위원을 겸해도 괜찮은가? 오늘날엔 모든 사람들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냐?”고 비웃겠지만, 적어도 1950년대까지의 한국 언론계에선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왜 그랬을까? 가장 큰 이유는 당시의 경제 수준이었다. 광고비를 지출할 기업은 물론 신문 대금을 낼 여유를 가진 국민도 많지 않았다. 오히려 정당의 정치적 후원이 지속적인 수입원이 될 수 있었기에 사실상 특정 정당의 대변지나 기관지 노릇을 하는 게 생존에 유리했다.

이젠 달라졌을까? 형식적으론 달라졌다. 언론인이 정당인을 겸할 수 없다는 건 이젠 상식이 되었다. 하지만 형식이 아닌 내용의 측면에서 보자면, 정파적 언론은 건재하다. 경향신문은 2007년 7월6일 사설을 통해 다음과 같은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본격적인 정치의 계절을 맞아 하루 전까지만 해도 신문사 편집국장과 논설위원 등으로 일하면서 ‘정치 중립’ ‘공정 보도’를 부르짖었던 중견 언론인들이 바로 다음날 대선주자 캠프로 출근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폴리페서’처럼 정치(politics)와 언론인(journalist)의 의미를 합친 ‘폴리널리스트’란 이름을 붙일 수도 있겠다.”

폴리널리스트 현상은 언론인 출신 국회의원이 늘 전체 국회의원의 10%를 넘을 정도로 고착화되었으며, 정파적 전쟁의 선두에 설 정도로 이전투구와 권모술수에 능한 폴리널리스트들도 나타났다. 그 덕분인지 언론의 정파성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2015년 1월 박재영 고려대 교수 연구팀은 조선일보·한겨레가 민주화 이후 20년간 대통령 선거 보도에서 특정 후보를 대변하는 정파적 보도 비율이 늘어나는 경향을 보였다며 “조선일보와 한겨레는 자신의 정파적 보도를 심각하게 재고해봐야 한다”고 했다. 이후 달라졌을까? 전문가들이 내린 다음 네가지 진단을 감상해보자.

(1) “매일 한국의 진보매체와 보수매체 사이트를 방문해 기사를 읽는다. 10년 넘도록 각 매체의 프리즘을 통해 비치는 한국의 모습이 완전히 다른 두 나라처럼 나뉘는 걸 보며 지금도 깜짝깜짝 놀란다.”(다니엘 튜더, 2015년 6월)

(2) “정파성은 정치적 이념으로 뭉친 파벌의식이고 당파성은 집단 이기주의로 뭉친 파벌의식이다. 이런 정의를 잣대로 한국 언론을 차분히 다시 들여다보면 정파적이라기보다는 당파적이라는 단어가 적합해 보인다. 그저 누가 우리 편인가에 따라 언론의 보도는 언제든 정치적 지향도 가치도 한순간에 다 내팽개쳐온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정연구, 2017년 6월)

(3) “한국 언론의 정파성은 이념적·정치적 성향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언론은 스스로 정당의 구실을 한다. 그래서 정당의 방식으로 사실을 다룬다 (…) 한국 언론의 정치 보도는 정치적 선전과 비슷한 작법을 택해왔다.”(안수찬, 2021년 9월)

(4) “언론의 진짜 문제는 정파성이다 (…) 기자들이 특정 정파나 정치세력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강한 유대감을 느끼고 그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기사 판단을 하고,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 글을 올리는 걸 전혀 문제로 인식 못한다.”(심석태, 2023년 2월)

언론의 정파성이 심화된 데엔 인터넷, 소셜미디어, 유튜브 등 새로운 매체가 미친 영향이 컸다. 무엇보다도 그런 매체를 통해 특정한 정치적 시각에 심취한 수용자의 압박이 커졌다. 걸핏하면 ‘불매’로 위협하는 그런 독자들의 눈치를 보지 말고 그들에게 도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현실성 없는 이상적 해법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정파성 그 자체보다는 상충하는 정파적 시각들 사이에 상호 소통이 전혀 없다는 점이 진짜 문제다. 모두 다 ‘마이웨이’다. 특히 칼럼과 사설이 그렇다. “우리의 마음에 풍파를 일으키지 말라”는 독자들의 요구에 순응하기에만 바쁘다. 자신의 주장에 반하는 반론이 있다는 걸 알 텐데도 진리를 설파하는 선지자처럼 자기 이야기만 한다. 이야기가 복잡해지는 걸 꺼리는 것 같다. 이게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정파적 언론의 전성시대는 영원할 것처럼 보이지만 소통을 죽이는 그 내재적 모순으로 인해 머지않아 황혼을 맞게 될 것이다. 정파적 언론사들이 한국을 다른 두 나라처럼 나누는 것은 거센 도전에 직면하게 돼 있다. 그런 두 나라 사이의 소통을 재미와 의미가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 증오·혐오 콘텐츠에 질린 사람들을 상대로 판매하는 새로운 언론 기업가들이 탄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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