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정의 와인클럽] "베토벤 청력도 앗아갔다" 와인과 납 '지독한 악연'
지난 12일 오전 인천광역시 주안역 인근 경인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으로 찾아갔습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납' 검사과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한국에 수입되는 와인에서 잇따라 납이 검출됐기 때문입니다. 국내 수입와인의 약 70%가 이곳 경인청에서 '식품검사'를 받습니다. 수입 와인은 주로 인천항, 인천공항을 통해 국내로 들어옵니다.
식약처에 따르면 지난 5월 프랑스 샴페인 '드 브노쥬 엑스트라 브뤼'에서 기준치(0.2㎎/㎏)를 초과하는 납이 검출됐습니다. 납 검출량은 0.3㎎/㎏으로 기준치를 살짝 초과했습니다. 지난해 수입하려다 '부적합' 판정을 받은 프랑스 부르고뉴(버건디) 지역의 와인 '도멘 비조 에세조'에선 무려 기준치의 50배가 넘는 12.7㎎/㎏의 납이 검출됐습니다. 식약처 관계자는 "생산 또는 유통과정 어디선가 납에 오염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앞서 2020년에는 한 병(750㎖ 기준) 가격이 1000만원이 넘는 최고급 와인 도멘 드 라 로마네 콩티(DRC) '라 타슈'에서 1.0㎎/㎏의 납이 나왔습니다. 이후 DRC는 식약처의 현지 실사 대상이 됐지만 소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2021년 11월 이후 DRC 전 제품에 대한 국내 수입 중단 조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납이 검출된 와인들은 애호가들이 한 번쯤 마셔보길 원하는 유명 와인들입니다. 도대체 이런 유명 수입 와인에 왜 납이 들어 있는 것일까요? 과거에는 와인에 납을 넣었습니다. 와인 애호가 베토벤의 죽음도 납이 들어 있는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이란 주장이 있습니다.
와인 애호가 베토벤의 죽음
"애석하다, 애석해, 너무 늦었어."
1827년 3월. 불멸의 악성(樂聖) 베토벤이 죽음을 앞두고 남긴 말이라고 합니다. 베토벤은 죽기 전에 무엇을 애석해하고 있었을까요. 베토벤 전기 작가들에 따르면 '와인'이었다고 합니다. 베토벤은 와인을 무척 좋아해 매일 한 병 이상씩 와인을 마셨다고 합니다. 그런 베토벤을 위해 그의 악보 출판사가 12병의 와인을 선물로 샀다는 소식을 들은 거지요.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던 와인을 마시기엔 건강이 너무 악화된 상태였습니다. 결국 베토벤은 56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베토벤은 죽기 전 자신이 죽으면 부검해 질병과 고통의 원인을 밝혀달라고 부탁합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고통스럽게 했을까요. 그가 남긴 유서가 있습니다.
베토벤은 이미 서른두 살 때 그의 동생 카를과 요한에게 유서를 씁니다. 의사에게 청력을 잃을 수 있으니 시골에서 요양하라는 권유를 받은 베토벤은 오스트리아 빈의 교외에 있는 작은 마을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요양합니다. 그러나 차도를 보이지 않자 베토벤은 우울증에 빠지고 그곳에서 유서를 쓰는데 이를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라고 부릅니다. 그의 유서에는 귀가 안 들리기 시작한 청년 음악가의 좌절이 묻어납니다. 베토벤은 45세에 청력을 완전히 잃습니다. '난청'을 인지한 것은 28세라고 하니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얼마나 힘든 시기를 보냈을지 짐작이 됩니다.
'들리지 않아요. 더 크게 말해 주세요'라고 사람들을 향해 고함칠 수 있겠느냐? 완벽했던 내 청각의 약점을 어찌 남에게 털어놓을 수 있겠느냐. (중략) 사람들이여, 그대들이 언젠가 이 글을 읽는다면 그대들이 나를 얼마나 부당하게 대했는지 생각해 보라. 베토벤이 32세에 쓴 유서
베토벤이 사망하자 그의 친구 요한 네포무크 후멜과 후멜의 제자 페르디난드 힐러가 조문을 갑니다. 베토벤의 귀는 부검을 위해 잘려져 나간 상태였습니다. 베토벤의 머리카락도 많이 없어졌습니다. 힐러도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잘라냅니다. 당시는 머리카락이 '불멸'의 상징이라 망자의 머리카락을 잘라 보관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 여러 명의 손을 거친 뒤 '힐러의 머리카락'으로 불리는 베토벤의 머리카락 다발이 1994년 소더비 경매에 나옵니다. 낙찰자는 머리카락 일부를 베토벤 관련 연구소에 기증합니다. 베토벤의 유언대로 병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1999년 핵에너지 연구로 유명한 미국 국립 아곤연구소가 흥미로운 검사 결과를 발표합니다. 그때까지 베토벤의 사인은 성병인 '매독'일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그런데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분석해보니 사인이 '납 중독'일 수 있다는 겁니다. 머리카락에서 일반인의 100배가 넘는 납 성분이 검출됐기 때문입니다. 반면 수은은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베토벤 활동 당시 수은이 매독 치료제로 사용됐기 때문에 매독 사망설은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과거 단맛 내기 위해 일부러 '납' 첨가
과거 단맛을 내는 사탕수수는 무척 비쌌습니다. 값싼 와인은 신맛을 감추고 단맛을 내기 위해 납을 첨가했습니다. 와인 애호가 베토벤이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셔 납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분석이 나올 법합니다. 베토벤의 '난청'이 납 중독과 연관이 있다는 연구 논문도 속속 등장합니다.
물론 베토벤이 활동하던 시기에 납은 만병통치약으로 통했기 때문에 꼭 와인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베토벤이 납에 오염된 다뉴브강의 민물고기를 먹었을 것이란 추측도 있습니다. 그러나 올해 3월 또 다른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베토벤의 납 중독설은 다시 뒤집힙니다. 베토벤의 머리카락으로 알려진 '힐러의 머리카락' 다발이 DNA 분석 결과 여성의 머리카락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연구진은 베토벤이 간 질환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국내 와인 수입업계에서는 "근래 들어서는 와인 양조 과정에 중금속 납을 넣는 경우는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해외 와인업계 관계자들도 와인에서 납이 나온 것에 대해서는 의아하다는 반응입니다. 납이 검출된 와인들이 워낙 유명 생산자들의 제품이라 다른 나라에서도 유사 사례가 있었으면 보고됐을 것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러면 식약처의 검사에 오류가 있었을까요. 식약처는 '납 검출' 등 기준에 부적합하면 재시험을 거쳐 확인한다고 밝혔습니다.
납 검사는 대상 와인을 일정 부분 따라 도가니 용기에 담은 뒤 450~550도의 가마에서 태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면 유기물은 날아가고 납 등 무기물만 남게 됩니다. 질산으로 정용을 한 후 납 성분을 분석하는 무기분석기기에 넣고 납 검출 여부를 확인하는데 기준치는 0.2㎎/㎏이지만 '불검출'이 정상이라고 합니다. 식약처 관계자는 "기기로 실험을 하기 때문에 사람의 의지가 들어가기는 힘든 구조"라고 말했습니다.
납 검출된 제조사 와인 유통
문제는 납이 검출된 와인과 같은 생산자의 와인들이 여전히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점입니다. 와인은 병행수입이 가능합니다. 한 와인을 여러 수입사가 유통할 수 있어 특정 수입사에 해명을 요구하기도 힘듭니다. 실제 문제가 된 로마네 콩티 라 타슈와 도멘 비조 에세조 와인은 공식수입사가 아닌 병행수입사에서 와인을 수입하려다 납이 검출됐습니다. 식약처가 로마네 콩티 라 타슈를 제조하는 DRC 전 제품에 대한 수입을 중단시키자, 와인업계에선 다소 과한 조치라는 평가가 나왔지만 소비자로선 안심이 됐습니다.
하지만 도멘 비조 에세조는 공식수입사도 납 검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본지가 기사를 내보내자 공식수입사인 크리스탈와인컬렉션 관계자는 "기준치 이상으로 (납이) 발견되면 당연히 수입이 금지된다. 식약처에서 어떤 문의나 제재 혹은 소명을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도멘 비조의 공식수입사인 크리스탈와인컬렉션에서 판매되고 있는 제품은 식약처의 정식검사를 통과한 제품으로 납이 검출되지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소비자가 보기엔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 식약처는 유통되고 있는 와인은 '도멘 비조 에세조 그랑크뤼'고 납이 검출된 와인은 '도멘 비조 에세조'라 다른 와인이란 입장입니다. 식약처 관계자는 "수입사에서 수입신고한 제품명이 기존의 수입품과 달랐고 라벨 디자인, 알코올 도수 등도 달라 관련 규정상 다른 와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도멘 비조'는 생산자의 이름이고 '에세조'는 포도밭 이름입니다. '그랑크뤼'는 포도밭의 등급인데 에세조 포도밭은 모두 그랑크뤼 등급입니다. 이름만 봐서는 같은 와인일 수 있는데 식약처 규정상 다른 와인으로 적용받은 겁니다. '동일 제품' 규정은 내년부터 바뀝니다.
가장 중요한 왜, 어떻게 와인에 납이 들어갔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게 됐습니다. 용기, 포장, 상수관, 포도밭 등이 납에 오염되는 등 여러 가능성이 있습니다. 납이 검출된 와인들이 '가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올해 납이 검출된 샴페인은 공식수입사가 생산자로부터 직접 와인을 받았다니 '가짜'는 아닙니다. 샴페인 드 브노쥬의 수입사 와이넬 관계자는 "현재 국내에 유통 중인 샴페인 드 브노쥬의 12종 와인은 식약처 정밀검사 기준에 부합하며, 검역 문제가 있었던 퀴베는 정상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 한 잠정적으로 수입 계획이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결국 수입와인에서 납이 검출됐지만 아무도 소명할 의무가 없습니다. 모두 적법한 절차를 거쳤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제도하에서라면 혹시라도 납이 든 와인을 마셨다면 그건 소비자가 '운이 나빴기' 때문입니다. 납과 같은 중금속 문제는 소비자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김기정 컨슈머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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