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연' 인질극에 韓기업 비상…美中갈등에 새우등 터지지 않으려면?
중국이 12월부터 이차전지 음극재의 핵심 소재인 흑연 수출통제에 나선다. 이에 따라 한국으로의 흑연 수입이 당장 막히는 것은 아니지만 조달기간이 늘어날 수 있어 국내 이차전지업계의 생산 부담이 예상된다.
특히 중국 정부의 이번 통제조치가 미국의 중국산 반도체 제재에 대한 '맞불' 성격이라는 해석이 나오면서 첨단 제조업을 둘러싼 미중 간 힘겨루기로 번질 우려도 나온다. 정부와 업계는 중국의 핵심광물 통제에 따른 단기적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입장이지만 '미국의 제재-중국의 핵심광물 통제' 공식이 반복될 경우 차질이 커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22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중국 상무부와 해관총서(우리나라 관세청에 해당하는 기관)는 지난 20일 흑연 일부 품목에 대한 수출통제를 12월부터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수출 통제 대상엔 이차전지 음극재용 고순도 천연흑연이 포함됐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전체 음극재용 흑연 2억4100만달러어치 가운데 93.7%를 중국에서 수입했다. 이에 따라 이차전지 음극재용 고순도 흑연도 중국 국경을 넘을 때 이중용도(군용) 여부를 검사받아야 한다.
이에 산업통상자원부는 중국 상무부와 대화채널을 통해 국내 업계에 영향이 최소화되도록 긴밀히 협의할 계획이다. 업계와도 흑연 공급망을 점검하고 공동 대응한다. 업계는 '수출금지'가 아닌 만큼 당장은 영향이 제한적이지만 복잡해진 절차에 대비해 추가 재고를 확보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방침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내년 가동 예정인 국내 인조흑연 생산공장이 빠르게 가동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며 "민간기업이 탄자니아 등 제3국 광산과 체결한 흑연 장기공급계약의 이행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정부 안팎에서는 중국의 이번 흑연 수출통제가 17일(현지시간) 미국의 첨단 인공지능(AI) 반도체의 대중 수출통제 기준 확대 조치 이후 나온 점을 고려하면 미국과 중국의 경제 패권경쟁이 수출통제로 나타났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미국이 군사 안보를 이유로 중국 내 반도체 제조시설 등에 제재를 가하면 중국은 자국산 제품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첨단산업 필수소재를 무기로 맞불을 놓는 식이다.
중국은 올해 8월에도 미국과 동맹국의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에 맞서 세계 생산량의 90%가량을 점유하고 있는 차세대 반도체 소재 갈륨·게르마늄 수출통제로 맞불을 놨다. 여기에 유럽연합(EU)도 중국산 전기차에 보조금이 부당하게 들어갔는지 조사에 착수하면서 중국과 서방의 경제안보에 대한 갈등은 커지고 있다.
앞으로 미국과 유럽 등 서방의 경제 제재가 심해질 경우 중국은 희토류·희소금속 수출통제를 맞불 카드로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갈륨과 게르마늄을 포함한 20개 핵심 원자재의 주요 생산국이며 제련과 가공 처리 분야도 지배하고 있다. 이차전지 양극재 소재인 수산화 리튬의 중국 의존도는 99%이고 니켈·코발트·망간은 93%, 전기차 모터 소재인 희토류 영구자석은 90%에 달한다.
우리 정부는 중국의 수출통제 확대 우려를 염두에 두고 상황을 예의주시한다는 방침이다. 단기적으로는 제조업 생산이 멈추지않을 만큼 민관 중심의 비축분 확보에나서는 한편 장기적으로 중국산 핵심광물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대체공급망 개발·확보가 필수적이라는 조언이 나온다.
산업부는 중국발 핵심광물 수출통제에 대비하기 위해 희소금속 비축량을 100일분 이상으로 늘리고 인도네시아·몽골·베트남·아프리카 등 자원 부국과 협력해 수입처를 다변화할 방침이다. 또 미국 주도의 MSP(핵심광물안보파트너십) 등 국제협의체도 적극 활용해 안정적인 공급망 구축에 총력을 다할 계획이다.
배터리 업계도 중국의 수출통제 상황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에선 포스코퓨처엠이 중국에서 수입한 천연흑연으로 음극재를 생산하고 있다. 다만 중국의 이번 조치가 수출금지가 아니라 '통제'인 만큼 공장을 멈출 정도로 긴급한 상황은 아니라고 일축했다.
포스코퓨처엠의 흑연 재고분은 한 달 반치로 알려졌다. 포스코퓨처엠 관계자는 "12월부터 적용되는 통제이기 때문에 그전까지 최대한 재고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과거 중국이 행했던 수출 통제 수준이면 수급이 크게 어렵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업계는 기존보다 흑연 조달 절차가 약 2~3주 더 소요될 것이라 전망한다. 갈륨·게르마늄의 경우 수출 허가에 시간이 걸려 통제 첫 달인 지난 8월 중국의 수출량이 '제로'(0) 로 떨어졌다.
중국산 흑연으로 만든 음극재를 쓰는 배터리사들도 관련 영향에 대비한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흑연은 중국에서 거의 전량을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을 거치지 않고 음극재를 만드는 곳은 없을 것"이라며 "지금은 중국의 규제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예의주시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어 "이미 수출신고 품목이던 인조흑연 음극재의 선례에 비춰보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며 "불확실성이 높아진 건 맞지만, 기존에 기울인 노력에 더해 공급망 다변화를 서두르고 있다"고 했다.
철강업계도 촉각을 기울인다. 흑연은 전기로 제련에 사용되는 핵심 소재 전극봉의 원료로도 사용된다. 현대제철, 동국제강 등 국내 철강사들은 고품질의 일본산 전극봉을 사용한다. 일본 전극봉 생산업체가 중국에서 흑연을 들여오기 때문에 흑연 공급량이 부족해지면 중장기적으로 리스크 요인이 될 수 있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흑연 공급량 부족해지면 일본 전극봉 생산 업체가 자국 수요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도 "과거 전극봉 대란을 거치며 구매선을 다양화해뒀기 때문에 당장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세종=최민경 기자 eyes00@mt.co.kr 이세연 기자 2counting@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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