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포토존’으로 인기 끄는 해치상…학술적으로도 재조명될까

도재기 기자 2023. 10. 22.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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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월대 복원으로 최근 존재감 드러내
일제 수난사 주목, ‘해치’냐 ‘사자’냐 규명 관심도
갖은 상징성 밴 “조선 후기 대표 조각상”
최근 광화문 월대 복원으로 존재감이 두드러지고 있는 광화문 해치(해태) 조각상이 월대 앞 동서 양쪽에 당당하게 우뚝 서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경복궁의 정문이자 서울 도심의 상징물인 광화문 월대와 현판이 최근 복원·공개되면서 관람객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월대 복원과 더불어 흔히 “광화문 해치(해태)상”이라 불리는 조각상 한 쌍도 월대 앞 양쪽에 우뚝 자리 잡았다. 광화문을 찾은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너나없이 해치상과 그 뒤의 월대·광화문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광화문 해치상 세부 모습. 서성일 선임기자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관계자는 22일 “월대·현판 복원 소식으로 광화문을 찾는 시민들이 늘어난 것 같다”며 “관람객들이 해치상~월대~광화문이 한 컷에 담기는 사진을 선호하면서 ‘광화문 포토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150여년의 역사를 지닌 해치상이 여느 때보다 존재감이 두드러지면서 일제강점기 당시의 안타까운 수난사도 새삼 관심을 끈다. 특히 해치상에 대한 학술적 연구성과가 적어 미술사 등 학계·전문가들의 연구도 활발해질 지 주목된다.

수난 겪은 해치상
광화문 해치상 곳곳에는 수난의 상처들이 지금도 곳곳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광화문 앞에서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던 해치상은 일제강점기 등 격동의 근현대사 속에서 이리저리 옮겨다니고 훼손되는 등 큰 수난을 겪었다. 실제 조각상에는 지금도 수난의 아픈 상처가 곳곳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광화문 해치상은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경복궁 중건(1865~1868) 당시나 직후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경복궁 중건 과정을 기록한 ‘경복궁 영건일기’(일본 와세다대 소장)에는 조성시기·제작자 등 관련 언급이 없다. 다만 <고종실록> 중 1870년 기사에 ‘해치’라는 언급이 있어 1860년대 후반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해치상은 조성 50여년 만에 첫 수난을 당했다. 명지대 한국건축문화연구소의 ‘경복궁 광화문 월대 및 동·서십자각 권역 등 고증조사 연구용역’ 보고서,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의 저서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 관한 조사보고서>, 당시 신문기사 등을 종합하면, 해치상은 1923년 10월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 광화문 앞 전차 선로를 확장하면서 월대 철거도 이뤄진 시기다.

사라진 조각상은 1925년 9월 동아일보의 ‘총독부 서편 앞 궁장 밑에서 무슨 하늘도 못 볼 큰 죄나 지은 것처럼 거적자리를 둘러쓰고 고개를 돌이켜 우는 듯 악쓰는 듯 반기는 듯 원망하는 듯한 해태를 발견’하고라는 기사로 소재가 알려졌다.

1910년대 말 광화문 전경 사진 속에 해치상 한 쌍이 서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문화재청 제공
조선 말기 대표적 화가인 심전 안중식의 ‘백악춘효’(여름, 국가등록문화재)의 세부. 1915년 그려진 작품에는 해치상이 선명하게 묘사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문화재청 제공

이후 해치상은 1929년 11월 조선총독부 청사 앞뜰에서 발견됐다. 일제가 정원 장식물로 삼은 것이다. 1929년 11월30일자 중외일보는 ‘귀양 풀려나온 해태’라는 제목의 사진을 소개했다.

해방 이후에도 해치상은 조선총독부에서 중앙청으로 바뀐 건물 앞에 서있었다. 1968년 ‘콘크리트 광화문’이 세워지면서 광화문 앞으로 나오지만 담장 가까이라 존재감이 없다. 2011년 광화문이 복원될 때도 해치상의 자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이번 광화문 월대가 100년 만에 복원되면서 당당하게 자리 잡았다.

지금도 원래 자리는 아니다. 명지대 한국건축문화연구소 연구에 따르면, 원래 자리는 월대 남쪽 끝에서 약 39m 떨어진 곳이다. 이순우 책임연구원은 “갖은 수난을 겪은 해치상이 월대 복원으로 그나마 자리 잡아 다행”이라며 “보다 많은 관심, 학계의 활발한 연구로 그 가치, 의미가 더 구체화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1910년대 광화문 해치상(왼쪽)과 조선총독부에서 도심을 촬영한 사진 속 왼쪽 아래에 보이는 해치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문화재청 제공
일제가 철거한 해치상이 경복궁 내 담장 아래에 방치돼 있다는 사실을 전하는 당시 동아일보 기사.
해치상의 발톱 부분이 손상돼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조선 후기 대표 미술품, 다양한 연구 나와야

해치는 흔히 신령스러운 상상 속 동물로 나쁜 기운이나 재앙, 화재 등을 막는 벽사의 의미로 인식된다. 특히 사람과 세상의 옳고 그름, 도리에 맞는 것과 어긋나는 시비곡직(是非曲直)을 가리는 정의의 동물로도 여겨졌다.

이에 따라 궁궐·관청 등 건축물, 각종 장신구 문양으로 활용됐다. 실제 해치 조각상이나 문양은 경복궁 근정전과 창덕궁 인정문, 덕수궁 중화전 등에도 있다. 현재 국회의사당, 대검찰청 인근 등에도 해치상이 서 있다.

광화문 해치상이 “해치가 아니라 사자”라는 전문가들 견해도 있다. 대표적 근거는 해치는 뿔 1개, 비늘 등으로 표현되는데 이 조각상에는 뿔, 비늘이 없다는 것이다. 해치가 조선 후기에 사자와 융합돼 뿔이 사라지는 등 변화됐다는 연구 성과도 있지만, 미술사적으로 기존 해치 도상들과는 차이가 큰 반면 18~19세기 사자 조각과는 유사하다는 것이다.

광화문 월대 복원과 함께 당당하게 서있는 광화문 해치상. 서성일 선임기자

익명을 요청한 한 전문가는 “해치상이란 인식은 <고종실록> 이후 무분별한 수용, 서울시의 상징 등이 되면서 대중적으로 강화된 측면이 있다”며 “연구가 부진하다보니 굳어진 상황”이라고 밝혔다. 그는 “명확한 근거들로 해치가 아니라 사자임을 규명하는 논문을 준비 중”이라며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해치상을 세웠다, 하마비라는 등의 여러 이야기들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광화문 조각상은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을 지키고 수호하는 조선 후기 대표 사자상”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해치상이 아니라 사자상의 변형이라는 견해는 고고미술사가인 고 김원룡 서울대 교수가 1960년대에 주장하기도 했다.

김민규 동국대 불교학술원 문화재연구소 전임연구원(문화재청 전문위원)은 “안타깝게도 이 조각상 연구는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해치보다 사자로 보는 전문가들도 꽤 있다”며 “분명한 것은 조선시대의 가장 크고 또 아름다운 동물 조각상”이라고 밝혔다.

미술사학자인 조은정 평론가는 “경복궁에 어울리는 수준 높은 작품이자 조선 후기 조각연구의 편년 기준작 역할을 할 수 있는 귀중한 미술품”이라며 “전문가들의 관심과 활발한 연구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광화문 월대와 현판이 최근 복원·공개된 가운데 광화문 일대에 관람객들이 몰려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새로 복원된 ‘검정 바탕에 동판 도금의 금색 글자’인 광화문 현판. 서성일 선임기자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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