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살 구실잣밤나무가 살린 서귀포 선덕사
‘인류세’에 늘 위태로운 상황에 내몰리는 나무들, 인간이 울타리 돼 지켜줘야
☞☞[제주 구실잣밤나무①]‘제주다움 상징 구실잣밤나무, 관광객에 밀려 뿌리 뽑힐 판’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구실잣밤나무의 주 무대는 한라산 중산간(해발고도 200~800m)과 곶자왈이다. 이곳을 비롯해 사람 손이 잘 닿지 않는 가거도·홍도의 먼 섬에서 구실잣밤나무는 안정된 숲의 형태인 ‘극상림’을 이룬다. 비슷한 기후대의 일본 천연림에서도 구실잣밤나무는 30% 이상 우점을 보인다고 한다. 한라산 중산간 서귀포시 상효동 선덕사 부근 숲도 대표적인 구실잣밤나무 군락지다. 효돈천을 따라 형성된 계곡길은 한낮에도 어둑어둑했다. 햇빛을 덜 받아도 잘 자라는 음수(陰樹)인 구실잣밤나무와 후박나무 등이 가지와 잎을 뻗어 하늘을 완전히 덮었다. 소나무 등 어려서부터 볕이 있어야 자라는 양수(陽樹)는 이런 숲에서 버텨낼 수 없다. 난대림의 특징인데, 월정사 앞 가로수길이 터널이 된 것도 같은 원리다.
2023년 10월10일 오후 선덕사에 올랐다. 일주문부터 본당인 대적광전까지 굽이굽이 자연지형을 살린 사찰이었다. 심장부인 대적광전 왼쪽엔 200살 이상으로 추정되는 구실잣밤나무 거목이 서 있다. 아무런 안내판이 없어도 특별하다는 건 나무 아래에 서보면 느낄 수 있다. 밑동에서 1m가량 높이에서 여섯 갈래로 뻗어나간 줄기(수간)가 20여m 꼭대기에 다다르면 수천 개의 가지로 갈라져 둥그렇게 큰 지붕을 드리우고 있었다. 1982년 개원 때부터 있었던 이 나무를 염두에 두고 건물(가람)들이 배치됐다고 한다.
일본에는 1천 살 고목도 있는데 제주에는 100살도 적은 이유
선덕사 신도회와 앞서 이곳을 답사한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임학)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선돌’(큰 바위들이 서 있는 지역)이라 불리는 이곳에는 수백 년 전부터 스님들이 수행하던 곳(도량)이 있었다. 1980년대 초 큰불이 나서 모든 건물이 불타 사라졌지만, 구실잣밤나무에는 불길이 전혀 닿지 않아 신령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수분을 많이 머금어 원래 불에 강한 성질도 한몫했을 것이다. 여기에 한 신도(보살)가 이 나무에 커다란 불기둥 세 개가 피어오르고, 불기둥마다 앉은 부처가 설법하는 꿈을 꾼 뒤 이 절에 전 재산을 시주했다. 이 돈으로 지금의 선덕사가 지어졌다. 이후 선덕사는 구실잣밤나무 아래 범천각을 세워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공양을 바치고 있다. 최영범 신도회 부회장은 “지금도 기억하는 분이 여럿 계셔서 그때 일을 얘기해주십니다. 이곳이 부처님을 모시는 사찰이라 신령스럽다는 얘기는 하기가 어려워 알리지는 않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밤나무가 100살가량 사는 것과 비교하면 구실잣밤나무는 수백 살, 일본에는 1천 살 넘은 고목도 더러 있다고 한다. 타고난 건강체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주에 구실잣밤나무는 흔하지만 100살 넘는 고목은 흔치 않다. 제주 전체에 보호수로 지정된 구실잣밤나무는 세 그루(제주시 아라동과 용강동, 서귀포시 보성리)뿐이다. 저지대에서 가깝다보니 오래전부터 땔감 등 목재로 손쉽게 이용된 탓이다.
홍석환 부산대 교수(조경학)는 “울창한 숲이 이뤄진 곶자왈 지역도 사실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땔감을 구하던 벌거숭이에 가깝던 곳이다. 특히 구실잣밤 같은 참나무류는 화력이 한번에 세지지 않고 은은하게 밤새 타기 때문에 선호하던 땔감이었다. 곶자왈이 워낙 습도도 높고 온도도 적당해 잘 자라서 몇십 년 만에 숲이 좋아진 것”이라고 말했다. 박상진 교수는 “구실잣밤나무는 재질이 치밀하고 단단해서 목재로도 널리 이용된 탓에 오래된 나무가 많이 남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주 전통 배로 일본과 중국 등을 오갔던 ‘덕판’도 구실잣밤나무 목재가 이용된 사례다. 한국인 최초의 가톨릭교회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1845년 사제서품을 받고 중국 상하이에서 귀국길에 오를 때 탔던 라파엘호가 바로 제주에서 만들어진 ‘구실잣밤나무 덕판’이다.
최근에는 구실잣밤나무가 사시사철 싱그러운 잎을 통한 탄소 흡입 능력이 다른 나무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또 특유의 항균력이 있어 고추역병 등 농작물의 각종 병원균을 억제하는 데 이용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나무의 밤알처럼 결실의 계절이 가까이
그럼에도 도시확장과 도로개발, 여기에 봄철 특유의 향기 등 여러 이유로 제주의 구실잣밤나무 가로수는 제주의 도심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제주의 한 대학 신문사는 2020년 6월 ‘봄·여름 애물단지 구실잣밤나무’라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10여 년 전만 해도 20% 정도 차지했던 구실잣밤나무 가로수 비중은 2022년 기준 2845그루(전체의 2.3%)만 남았다. 김찬수 전 산림청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구실잣밤나무 향기가 ‘불쾌하다’는 얘기는 육십이 넘어 처음 들어봤습니다. 억지스러운 주장이에요.”
어쩌면 인류가 지구환경을 바꾸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된 지질시대 인류세(핵실험이 시작된 1945년 이후)에 접어들어 나무는 인간의 배려 없이는 늘 위태로운 상황에 내몰리는 것이 아닐까. 선덕사 구실잣밤나무가 땔감용으로 잘려나가지 않고 200년 이상 살았던 것도 사찰이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식물분류학자 허태임 박사는 <밤나무와 우리 문화>(2023년 9월 ‘숲과문화’ 펴냄)에 쓴 기고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서남해 먼 섬에 입도해서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풍경은 구실잣밤나무 군락이다. 계절의 구분 없이 늘 푸른 모습으로 섬을 에워싸는 그 나무들의 위엄찬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나흘 식물 조사를 하다보면 저절로 알게 되기도 한다. (…) 어느새 꽃향기는 사그라들고 다글다글 열매가 여물 채비를 한다. 가을이 당도하는 것이다. 내륙 곳곳의 밤나무와 먼바다 갯마을의 구실잣밤나무와 그 나무들의 밤알을 살피는 당신에게도 하늘이 높아지는 결실의 계절이 한 걸음 더 가까이.”
제주=글·사진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온통 회색인 도시에 새들이 우짖습니다. 돌아보면 어김없이 키 큰 나무가 서 있습니다. 사방으로 잎과 가지를 뻗어 세상을 숨 쉴 곳으로 지켜줍니다. 곤충, 새, 사람이 모여 쉽니다. 이야기가 오갑니다. ‘나무 전상서’로 나무를 아끼고 지키는 사람들의 마음을 전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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