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다움 상징 구실잣밤나무, 관광객에 밀려 뿌리 뽑힐 판
월정사 앞 2차로 ‘숲 터널’… ‘아름다운 가로수길’로 지정해놓고 4차선 확장에 뽑힐 위기
“제주도 행정은 관광객 관점… 가로수로 녹음 만들고 탄소 흡수 등 기후위기 시각 없어”
2023년 10월10일 오전 제주공항 남쪽으로 6㎞ 떨어진 제주시 오라동 월정사 앞길을 걸었다. ‘두둑’ 작은 알갱이가 머리와 어깨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0.8g가량에 1.5㎝ 남짓 모양새는 작은 도토리 같지만 힘들여 묵 쑤지 않아도 생것을 바로 먹는다. 밤과 같다. 가시투성이 껍질도 없어 수고를 던다. ‘(구실)잣밤’, 제주말로는 ‘조밤’(저밤·제배)이다. 우리나라 참나무 일가 중 생으로 먹는 건 밤과 구실잣밤이 유일하다. 우리말 ‘밤’의 어원은 ‘밥’이다. 길거리에 ‘밥’이 주렁주렁 달린 셈이다. 축복받은 섬이다. 줄기와 가지에 이끼와 일엽초 같은 양치식물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도 즐겁다.
걷고 싶은 길도, 전국 가장 아름다운 도로도
구실잣밤나무는 구슬(구실) 같은 자잘한(잣) 밤이 열리는 나무라는 뜻을 담았다. 라틴어 이름도 카스타놉시스(Castanopsis)로, 즉 ‘밤(Castana)을 닮았다(-opsis)’는 뜻이다. 겨울에도 푸른 잎을 자랑하는 게 특징이다. 성격 급한 일부 느티나무가 노랗게 붉게 물든 이날도 구실잣밤나무는 한여름처럼 짙푸른 잎이 무성했다. 구실잣밤나무를 비롯해 후박나무·녹나무·먼나무·담팔수 같은 ‘늘푸른 넓은잎 키큰나무’(상록활엽교목)가 이룬 숲이 이따금 내리는 눈에도 푸르디푸른 것은 제주도와 한반도 남부 해안 지역 등 난대성 기후에서만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소중한 풍경이다. 단풍과 낙엽 그리고 나목(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으로 가을과 겨울을 떠올리는 서울 등 중부지방 사람들에게는 영 생소한 풍경이다.
몇 알 주워 먹어봤다. 잘 익은 건 까만 껍데기가 살짝 벌어졌다. 하얀 속살이 보였다. 엄지손톱으로 약간 벌렸다. 알맹이가 쏙 빠진다. 고소하고 달콤했다. 제주 사람들은 잣밤을 가을에 모았다. 겨울과 이듬해 봄까지 식구들과 함께 생으로 먹고, 밥 지을 때 넣어 먹고, 구워 먹었다. 고마운 양식이다.
월정사 앞에서 시작해 북쪽으로 330m 정도 이어진 2차선 찻길 양옆엔 60살 된 거목 구실잣밤나무 75그루가 숲 터널을 이루고 있다. 가슴높이 둘레 1~2.5m, 키 10~15m였다.(제주참여환경연대 ‘가로수 모니터링단’ 조사) 잎과 가지를 사방으로 10~15m가량 넓게 뻗어 만들어낸 터널(찻길) 안으로 들어가면 어둑어둑 하늘이 보일락 말락 한 것이 장관이었다. 2020년 제주시가 ‘걷고 싶은 아름다운 가로수길’로 선정한 이유다.
그런데 이 길이 위태롭다. 제주도청은 2022년 10월에 2023년 착공을 목표로 이 길을 4차선으로 확장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차량 통행 증가”가 이유였다. 시민사회는 반발했다. “전반적으로 검토 중”(도청 도시계획과 담당자)이라며 다소 누그러지긴 했지만 긴장은 계속됐다. 똑같은 이유로 ‘전국 가장 아름다운 도로’로 선정된 비자림로 삼나무 2천여 그루 벌목 계획도, 제주도청은 환경부 제동이 풀리자 2022년 12월 재개했던 터다. “나무와 숲을 보전하는 일을 차량 통행의 걸림돌로만 인식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970년대 심어 수십 년을 키운 이 나무들이 만든 아름다운 숲길을 없앤다고 해요. 시민들이 반발하니 옮긴답니다. 2017년 제주여고 구실잣밤나무들이나 2022년 서광로 담팔수들도 옮겼지만 처참합니다. 이렇게 큰 나무는 옮길 때 편하게 하려고 뿌리와 가지를 대부분 잘라냅니다. 옮긴 나무들은 다 죽어가고 있어요. 옮긴다는 건 사실상 갖다버리는 거죠. 시민들이 아끼는 길이라고 하니 고민하는 모습이지만, 이미 토지 매입까지 다 끝냈어요. 추진하려는 의지가 강하죠. 교통량 문제는 일방통행으로 바꿔서 해결하거나 이런 숲길은 사람들이 이용하도록 오히려 완전 보행길로 바꾸는 게 맞죠.” 이날 현장에 나온 홍영철 제주참여환경연대 공동대표가 말했다.
‘차가 먼저’… 제주는 가로수 식재율 전국 최하위
화려한 터널 숲이었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달랐다. 제주도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메마른 아스팔트 길에서 물을 찾아 발버둥 치며 내뻗은 뿌리에 보도블록이 들려 있었다. 썩은 부위도 쉽게 눈에 띄었다. 하나같이 찻길 쪽으로 뻗은 뿌리가 뭉텅 베어지고, 보행길 쪽으로 뻗은 굵은 가지는 전깃줄에 닿을까 마구 잘라낸 탓이다. ‘차가 먼저다’가 제주도청 기조일까. 이 아름다운 터널이 찻길 위만 덮어줬다. 보행길은 대부분 볕에 휑뎅그렁 나와 있었다.
홍영철 대표는 “제주도 행정은 관광객, 차를 타고 다니는 관광객의 관점으로 돌아가는 게 다른 지역과 달라요. 가로수 행정도 그래요”라고 꼬집었다. “예를 들어 4차로인 일주도로엔 가로수가 없어요. 관광객이 차창으로 경치 구경을 한다는 이유예요. 걷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아요. 기후위기 시대에 거주자를 위해 가로수로 녹음을 만들고 도시열섬현상을 완화하고 탄소를 흡수하고 이런 걸 생각하지 않아요. 관광객에게 이국적으로 보여야 한다는 것만 생각하죠. 그래서 기후에 맞지 않는 워싱턴야자수 같은 걸 심는데, ‘기능’보다는 ‘관광객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하죠.” 그는 이어서 말했다. “악순환이에요. 제주도는 개발이 가장 활발한 곳이에요. 차가 막힌다고 길을 넓히면 그 길을 따라 개발되고 금세 교통이 늘어나서 다시 차가 막힙니다. 결국 자연은 훼손되고 부동산 개발업자들만 잇속을 챙기고 시민들은 힘듭니다. 대중교통을 늘려야 하는데, 이용객이 많은 곳에만 버스가 집중되는 문제도 버스회사 눈치 보느라 풀지 못하고 있어요. 손쉬운 도로 확장에만 치중하죠. 가로수는 환경문제일 뿐 아니라 행정·자치 문제고 민주주의 문제더라고요.”
제주참여환경연대 자료를 보면 서울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 ‘제주’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는 전국 시도 중 가구당 차량 보유 대수가 1.309대로 가장 많고, 가로수 식재율은 전국 최하위(0.7%)다. 그 결과 대중교통 이용 횟수는 꼴찌(전남)에서 둘째(1주 7.83회)고, 제주도민의 비만율은 전국 1위다(2022년 기준). 반면 제주 시내 노형동의 30평대 아파트 가격이 10억원을 훌쩍 넘긴 지 오래다. 서울 뺨치는 수준이다. ‘제주답다’는 건 뭘까.
가난한 섬이라 구실잣밤나무가 가로수로
월정사 안에는 이 가로수길과 같은 시기에 심은 구실잣밤나무가 있다. 가지가 우산처럼 고루 뻗어 수형이 아름답고 풍성했다. 그래서 일본에선 ‘브로콜리 모양’이라고 한다. 잎의 위아래 부분이 대비됐다. 위쪽은 짙은 녹색으로 얇게 왁스층이 발달했다. 미세한 털이 모여 자라는 아래쪽은 옅은 갈색이다. 이날 아침 햇살에 비치니 ‘금빛’이라고 홍 대표와 일행들은 의견을 모았다. 이런 강인한 겉모습은 여름철 뙤약볕과 가문 겨울에 수분을 잘 뺏기지 않도록 제주도 기후에서 오랫동안 진화한 결과다.
결과적으로 제주도만의 풍치를 제공하지만, 1970년 초 공항 주변 등 제주 시내에 가로수 식재가 시작될 때 구실잣밤나무가 선발된 이유는, 당시만 해도 가난한 섬 현실 때문이었다. “가로수 용도로 양묘된 묘목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공급업자들이 가까이에서 쉽게 캐와서 납품한 것을 일단 썼죠.”(김찬수 전 산림청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장)
제주=글·사진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제주 구실잣밤나무②]‘200살 구실잣밤나무가 살린 서귀포 선덕사’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온통 회색인 도시에 새들이 우짖습니다. 돌아보면 어김없이 키 큰 나무가 서 있습니다. 사방으로 잎과 가지를 뻗어 세상을 숨 쉴 곳으로 지켜줍니다. 곤충, 새, 사람이 모여 쉽니다. 이야기가 오갑니다. ‘나무 전상서’로 나무를 아끼고 지키는 사람들의 마음을 전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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