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에 왔는데 대기 10명"…아이 키우는 부모들 '한숨' [이슈+]
필수 의료 공백 속 '의대 정원 확대' 점화
여야 모처럼 한목소리…국민도 반겨
관건은 의료계 반발…"칼 우리가 쥐고 있다"
충남 천안에서 6살 딸을 키우는 박모씨는 최근 딸이 열감기 기운이 있어 동네에서 입소문이 난 소아청소년과를 찾았다. 오전 11시께 병원에 도착해보니 대기 인원만 150명이 넘어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박씨는 다음 날 새벽 3시께 일어나 대기표를 뽑으러 소아청소년과로 향했다. 그는 "새벽 5시 전에 도착했는데 벌써 기다리는 사람들이 10명은 넘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박씨가 체감한 '소아청소년과 대란'은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의료계에서는 '소아 의료체계 붕괴'를 점치고 있을 정도다. 국회 입법조사처가 발간한 '2023 국정감사 이슈 분석' 보고서에 실린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요양기관 개·폐업 현황 자료에 따르면 소아청소년과 개업 건수는 2018년 122곳에서 매년 줄어 지난해 84곳으로 떨어졌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확보율은 2020년 71%에서 올해 25.5%로 급락했다. 전공의 모집 정원은 채우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모집인원 199명 중 33명만 지원하면서 지원율은 16.6%에 머물렀다. 설상가상 전문의가 되기 전 이를 포기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중도 포기율은 2017년 6%에서 지난해 23%로 급증했다.
필수 의료 공백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는 고스란히 영유아를 키우는 국민들에게 돌아가면서 볼멘소리는 더욱 커지는 분위기다. 이 가운데 정부가 내놓은 '의대 정원 확대' 방침이 주목받고 있다. 17년간 3058명으로 동결됐던 의대 입학 정원을 2025년 입시부터 늘리겠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증원 규모는 나오지 않았다. 여야는 각자 셈법은 다르지만, 증원 필요성에는 이례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9일 필수 의료 혁신 전략회의에서 "지역·필수 의료를 살리고 초고령 사회를 대비하기 위해 의료인력 확충과 인재 양성은 필요조건"이라며 "소아청소년과·산부인과와 같은 필수 분야에 인력이 유입될 수 있도록 의료진의 법적 리스크 완화, 보험수가 조정, 보상체계의 개편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했다. 국민의힘은 "의대 정원 확대는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했고, 더불어민주당도 "윤석열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움직임을 환영한다"고 했다.
국민들도 반기고 있다. 넥스트리서치가 매일경제신문 의뢰로 실시해 지난 16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71.1%가 의대 정원 확대에 찬성했다. 보건의료노조가 지난 3월 서던포스트에 의뢰해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서도 의대 정원 확대에 '찬성한다'는 응답은 66.7%, 의사가 부족하다는 응답은 58.4%였다. 의사가 많아지면 의료계 경쟁이 발생하고 이는 자연스럽게 실익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감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관건은 의료계의 반발이다. 이들은 먼저 의대 정원 확대가 필수 의료 공백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의료진에 대한 무리한 소송, 소아청소년과·산부인과 등 필수 의료 분야에 적용되는 불합리하거나 낮은 보험 수가, 필수 의료 분야 의료진에 대한 시혜적 보상체계, 의료 사고 시 과도한 법적 책임 등이 그동안 의료계에서 해결을 촉구한 고질적인 문제들로 꼽힌다.
한 피부과 전문의는 통화에서 "소아청소년과는 요즘 학교와 마찬가지로 악성 민원이나 분쟁이 많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은 지난 15일 페이스북에 '의대 증원에 부치는 경고'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의대 증원을 통해 의사 수를 늘려봐야 의사들이 필수 의료에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미용·성형 등 비필수 의료분야에 지원할 것"이라며 "그것마저 포화되면 모두 해외로 나갈 것이다. 필수 의료로 돌아올 정책을 만들지 않고 의대 증원을 하겠다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더 많은 물을 붓겠다는 발생과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회장도 지난 17일 서울 용산구 의협 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소아 진료 인프라 붕괴는 허송세월로 일관하다가 지난 9월 정책 수가 3500원을 더 줘 놓고 부모, 아이 모두 안심할 소아 의료체계를 개선하겠다고 한다"며 "환자 치료하다 감옥 가지 않도록 안전하게 해달라고 했더니 그 어떤 대책조차 내놓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의협은 총파업 카드도 꺼낼 수 있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이필수 의협 회장은 지난 17일 언론 브리핑에서 "정부가 의대 증원 방안을 일방적으로 발표할 경우, 14만 의사와 2만 의대생은 모든 수단을 동원한 강력 투쟁에 들어갈 것"이라며 "2020년 파업 때보다 더 큰 불행한 사태가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의협 회장을 지낸 주수호 미래 의료포럼 대표는 의료전문 매체 메디게이트뉴스에 기고한 칼럼에서 "칼자루는 저들이 아니라 우리가 쥐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자"고 제안했다.
홍민성 한경닷컴 기자 msho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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