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기억하도록 보존해야”…고문 피해자가 말하는 대공분실[지워진 역사, 잊힌 유적-대공분실②]
〈지워진 역사, 잊힌 유적-국내편〉 [5] 남영동과 32개의 대공분실
[헤럴드경제=박지영 기자] “모든 시설을 기념관으로 만들 수는 없죠. 하지만 경찰의 부정적인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최소한의 장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경찰의 사기를 떨어트리자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경계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서요.”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피해자 68세 권형택 씨)
“대공분실에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피나는 노력도 있었습니다. 아픈 역사도 발전시켜야 할 역사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경각심을 가지기 위해 보존 노력이 필요합니다.”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피해자 74세 유동우 씨)
대공분실을 몸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받은 사람들이다.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절대 잊어서도 안되는 역사. 고문 피해자들은 대공분실의 역사를 보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고 말했다.
“1981년 여름이었어요.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갔는데 갑자기 스피커에서 ‘유해우(유동우 씨의 옛 본명)씨 중대본부로 올라오세요. 유해우 씨. 유해우 씨.’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를 부르는거였습니다. 훈련장에서 300~400m쯤 걸어올라가니 건장한 남자 2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명찰을 확인하더니 양팔을 딱 붙잡더군요. 연병장을 벗어나자마자 말투가 달라졌습니다. 팔을 강하게 옥죄더니 ‘여기에서 소리 지르거나 도망갈 생각하지마’ 경고를 했습니다.”
지난 9월 경기도 의왕시에 위치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건물 회의실에서 유동우 씨를 만났다. 그는 1981년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 활동을 이유로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돼 한달 동안 고문을 당했다. 2019년부터 약 2년동안 남영동 대공분실 내부를 안내하는 민주인권기념관 해설단으로도 활동하기도 했다.
유 씨는 40여년 전 남영동에서 있었던 일을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고문은 혹독했다. 9월 11일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될 때까지 구타와 물고문에 시달렸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유 씨는 차라리 목숨을 끊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잠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1m 남짓한 화장실 분리벽에 머리를 몇번이나 박았다. 아프기만 하고 죽지는 않았다”며 “심문관들은 자해를 하면 안된다고 경고했다. 그런데 막상 자해 흔적도 못 알아보더라. 그 정도로 꼴이 말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유씨와 대공분실의 악연은 끝이 아니었다. 1990년 4월, 서울 홍제동의 대공분실에도 끌려갔다. 합류한지 한 달 정도 된 노동 상담소에서 발견된 책이 문제가 됐다. 국가보안법 위반 서적을 소지했다는 혐의였다. 다행히 본격적인 고문은 없었지만, 민주화 이후에도 대공분실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 수 있었다.
유씨는 현재 남아있는 대공분실이 어떤 방식으로든 보존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유 씨는 “암울한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없애버리고, 은폐시키는 방식으로는 반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공분실의 흔적을 교육시키기 위해서라도 남겨둬야 한다고 말했다. 유씨는 “대한민국이 1960~1980년대로 돌아갈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쿠데타가 일어난다. 총칼로 정권을 잡는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이 있기까지 대한민국도 민주주의와 독재가 엎치락뒤치락 했다”고 말했다. 이어 “국가 폭력 피해자에 대한 명예 회복과 배상·보상, 가해자 처벌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교육시키는 일도 중요하다”며 “곳곳에 남아있는 대공분실을 지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1985년 10월 7일. 권형택 씨는 유씨 이후 5년 뒤에 남영동에 끌려갔다. 결혼식을 올리고 2박 3일 설악산으로 신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날이었다. 권씨의 뒤를 밟다 청첩장을 입수한 정보 경찰의 ‘배려’였다. 한달 전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의 고문을 폭로한 뒤여서 ‘살인적인 고문’은 없었다. 물론 욕설과 구타, 수면 고문은 여전했다.
경찰은 서울 입구 톨게이트에 새신부를 내려주고 권씨만 남영동으로 데려갔다. 대공분실 건물 앞에 와서야 안대로 눈을 가렸다. 권씨는 “눈을 가리고 5층까지 회전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늦은 밤, 삐걱삐걱 철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소리, 가린 눈 사이로 어스름하게 비치는 조명…연행되는 사람의 공포를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들이었다”고 묘사했다.
권씨는 “대공분실을 나와 경찰 유치장으로 갈 때는 정말 지옥을 빠져나오는 기분이었다. 유치장이 천국처럼 느껴질 정도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권씨 역시 대공분실을 한 번더 마주쳐야 했다. 이른바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사건’으로 1991년 서울 옥인동 대공분실을 다시 방문했다. 대공분실은 어디에나 있었다.
권씨는 대공분실을 무조건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남아있는 옛 대공분실을 안보수사대(보안경찰)이 사용하는 것도 무작정 막을 수는 없는 일이라고 본다. 권씨는 “보안 수사도 분명히 경찰의 중요한 역할이다. 과정에서 인권 유리 사태가 일어나면 안된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보안 수사 용도로 남겨두는 것 자체를 문제시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런 기관일수록 인권의식이 오히려 다른 경찰보다 더 높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평소에도 긴장하는 마음을 되새길 수 있도록 표지석이든, 안내문이든 어떤 형태의 기념물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며 “설명판, 동판 등 현재 그곳에서 근무하는 경찰들도 수용할 수 있는 수준에서 기억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신 전국에 흩어진 대공분실의 흔적을 남영동 대공분실터에 세워질 민주화 인권기념관에 담는 방식을 제안했다. 권씨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남영동 대공분실 기념관 조성 추진팀장을 맡기도 했다. 권씨는 “남영동 기념관에서 여러 대공분실과 시설에서 인권 탄압이 있었다는 전시를 하는 방법도 있다. 모든 시설을 기념관으로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워진 역사, 잊힌 유적 전체 시리즈〉
〈독일편〉
[1] 뉘른베르크편
-인류역사의 수치를 공개하다
[2] 베를린편
-역사 전쟁없는 도시
〈국내편〉
[1] 근현대사 유적지도
[2] 당신이 모르는 6·25
[3] 잊힌 친일 문화 잔재
[4] 누구의 것도 아닌, 적산
[5] 남영동과 32개의 대공분실
park.jiyeong@heraldcorp.com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선균 아내 전혜진, 강남 빌딩 1년만에 매각 재조명
- "차 긁고 연락준게 고마웠다"…김민종 '롤스로이스 미담'에 밝힌 심경
- “싸다고 해서 덥썩 6만원에 샀다” “난 8만원이다” 성토장된 ‘국민 메신저’
- "요새 뭐하나했더니…" 이휘재, 청담동 빌라 팔아 60억 차익
- “아이폰 들고 샷?, 낯익은 ‘얼굴’ 누군가 했더니” 40대까지 …속타는 삼성
- 60대 男방송인 “남친 나 어때” 10살 女스타, 눈물 참다 끝내 울어버렸다
- “결국 전혜진까지 내렸다” 충격의 ‘이선균 마약 의혹’ 사태…손절 나선 기업들
- 백지영, 정석원과 발리 여행...핫핑크 비키니에 가디건 '눈길'
- “日촬영 추정 ‘가슴 드러낸’ 조선女가 자랑스러운 엄마?” 독일서 무슨 일
- '경운기 교통사고' 오정세 측 "운전자는 매니저, 유족에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