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충제 만들던 이 회사…페니실린·비아그라 덕에 ‘세계 1위’ 우뚝섰다 [추동훈의 흥부전]

추동훈 기자(chu.donghun@mk.co.kr) 2023. 10. 22.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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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27][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22] 찰스 파이저

코로나19 바이러스 대유행으로 전 세계가 고통받을 때, 조용히 미소 짓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코로나 백신 및 치료제를 개발한 제약사들이죠. 코로나 특수를 톡톡히 누렸던 제약업계. 본격적인 엔데믹이 시작되면서 이들의 매출도 고꾸라질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는데요. 코로나 백신 제조사 화이자가 대표적입니다. 최초의 코로나19 바이러스 백신 코미나티주를 개발하며 이목을 끌었던 화이자는 올해 매출 예상치를 기존보다 90억달러 가량 낮춘 580~610억 달러가 될 것이라고 고쳐잡았습니다. 당연하게도 코로나19 백신 매출이 크게 급감하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최초 백신 중 한축을 도맡았던 화이자는 글로벌 제약사로의 입지와 실적을 공고히 하며 그 이름값을 드높였습니다.

찰스 파이저
사실 화이자의 정확한 이름은 파이저입니다. Pfizer라는 회사명에서 P는 묵음인데, 이게 사실은 일본식 영어발음이 그대로 넘어오며 국내에선 화이자로 등록됐지만 외래어 표기법대로 읽는다면 파이저가 정확합니다. 그래서 이번주 찰스 화이자가 아니라 ‘찰스 파이저’가 바로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22번째 주인공입니다.

찰스 파이저는 1824년 3월 독일 남서부 뷔르템베르크왕국의 루트비히스부르크에서 태어난 독일계 미국인입니다. 제과점과 식료품점을 운영하던 칼 파이저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독일에서 상업 교육을 받았고 약사 견습생으로 공부했습니다. 즉 약학과 화학에 대한 기초 지식이 탄탄했습니다. 어지럽던 유럽 정세로 인해 불안감을 느낀 그의 가족은 1848년 10월 미국으로 이주하며 아메리칸 드림의 꿈을 키웠습니다. 사실상 미국 이주에 나서며 사업적 구상은 머릿속에 그려져 있었고 더 나은 경제적 기회와 자유를 찾아 떠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1848년은 국민국가들의 봄이라 불리며 유럽 전역에 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였습니다. 독일 역시 3월 혁명이라 불리는 민중 봉기가 독일 연방 곳곳에서 발생하며 많은 사람들이 독일을 떠나 미국과 유럽 곳곳으로 이주했습니다. 칼 마르크스 역시 당시 프로이센을 떠났던 대표적 인물 중 한명입니다. 현재 독일계 미국인의 상당수가 당시 혁명의 여파로 넘어왔는데 파이저 가족 역시 이 중 하나인 셈이죠.

이듬해인 1849년 파이저는 곧바로 사업에 뛰어듭니다. 아버지로부터 2500달러를 빌려 뉴욕의 브루클린 지역 윌리엄스버그의 상업용 건물을 매입했고 구충제 사업을 시작합니다. 운 좋게도 그에게는 든든한 동반자가 있었습니다.

찰스 에르하르트
바로 처남인 찰스 에르하르트였죠. 그 둘은 의기투합해 1849년 찰스 파이저&컴퍼니를 설립했습니다. 처음부터 제약회사는 아니었고 각종 화학물질을 제조해 만드는 기업이었죠. 사업초창기 개발한 산토닌은 파이저의 효자상품이었습니다. 구충제에 널리 사용되는 산토닌 중에서도 쓰지 않은 맛이 나는 산토닌으로 인기를 모았고 이는 초반 파이저의 사업의 기반을 닦는데 큰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

또한 재정적으로도 다양한 신약을 개발하는 밑천이 됐습니다. 찰스 파이저는 직업 영업에 나서고 소매업체와 도매업체를 찾아다니며 열심히 매진했죠. 사업이 번창하며 1854년 생산시설과 관리 시설을 추가로 매입해 사업확장에 나섰습니다.

초창기 화이자 로고
또한 전쟁의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1861년, 노예제를 둘러싼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연방군은 약품 대부분을 파이저로부터 공급받았습니다. 그 덕에 파이저는 맨하탄으로 본사를 옮겨 월스트리트 메이든 레인 81번가에 자리 잡으며 뉴욕의 심장부로 진입합니다.

파이저는 장사수완도 좋았습니다. 전쟁 등 여러 기회가 왔을때 파이저는 ‘파이저 퀄리티’라는 고유의 브랜딩에 나서며 높은 품질을 보장했습니다. 독일 및 유럽등지에서 양질의 원료를 사용해 고품질의 화학제품을 만들어내면서 파이저에 대한 입소문은 미국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파이저는 특히 신약개발 뿐 아니라 부동산 사업에도 밝았습니다. 앞서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주하자마자 아버지로부터 돈을 빌려 건물을 샀던 파이저는 이후 돈이 모이는 족족 부동산 매입에 나서며 투자 안목을 보여줬습니다. 브루클린 뿐 아니라 맨하튼, 플러싱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뉴욕 안팎의 핵심 부동산을 긁어모으는 수완을 발휘했습니다. 이는 파이저가 글로벌 제약업체로 성장하는 밑바탕이 됐습니다.

특히 글로벌 기업들의 부동산 장사수완은 눈여겨볼만 합니다. 전세계 1위 햄버거 프랜차이즈 맥도날드 역시 패스트푸드보단 부동산개발 수완이 더욱 뛰어나다는 사실, 저희가 저번에 다룬적이 있었죠. 파이저 역시 이러한 부동산 개발 및 투자 감각만큼은 뛰어났습니다.

화이자 구연산
회사의 퀀텀점프는 파이저의 황혼기인 1880년대 찾아옵니다. 코카콜라가 개발되고 청량감을 내는데 필수적으로 쓰인 구연산을 바로 파이저가 생산하기 시작하며 주력상품으로 떠오른 것이죠. 이어 그의 동업자 에르하르트가 1891년 사망하자 파이저는 그의 지분을 인수해 단독 소유주가 됐고 그의 자식들에게로 사업을 물려줄 후계획을 세우기도 합니다.

사실 제약회사라기보다 각종 화학 화합물 개발기업으로 알려졌던 파이저를 제약기업으로 완전히 피버팅한 것은 다름아닌 페니실린이었습니다. 구연산 생산기업 파이저가 20세기 초반 원료난 탓에 설탕을 곰팡이로 발효시켜 구연산을 만드는 실험을 해왔는데 이때 습득한 발효기술을 기반으로 페니실린 양산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파이저가 보유한 페니실린 발효조 보관 기술을 기반으로 페니실린 양산에 성공했습니다.

화이자 페니실린
이후 20세기 초반을 휩쓴 세계1,2차 대전 당시 미국은 파이저로부터 전체 물량의 90%에 달하는 페니실린을 공급받으며 지금의 파이저를 만든 것입니다.

찰스 파이저는 1906년 뉴욕 뉴포트에 있는 자택 계단에서 넘어지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단독 소유후 1942년 상장되기 전까지 비공개 기업으로 운영해온 파이저는 이후 기업공개와 더불어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되면서 글로벌 제약회사로의 도약에도 성공합니다.

화이자 백신
사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 이전 화이자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대표작은 다름 아닌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였습니다. 지금의 화이저를 만든 일등공신으로 이를 꼽는 사람들도 많은데요.

비아그라의 독점 특허권이 종료되며 시장의 우려를 키웠던 화이자에 새로운 기회를 준 것이 바로 코로나19 백신 코미나티주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엔데믹이 다가온 화이자는 또 어떤 신약을 개발해 인류를 이롭게하고 기업의 몸값을 드높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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