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달린다, 내일 뛰기 위해서”

민소영 2023. 10. 22.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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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서울에서 열린 동아마라톤 대회에 출전한 고명균 제주서부경찰서 여성청소년계 수사팀장


인생은 마라톤이라고 했던가. 어머니에게서 태에서 세상의 빛을 보고, 청년으로 자라 직업인이 되어 치열하게 살고, 중·장년을 거치며 잘 익어가는 시간을 보낸 뒤, 건강하게 노년을 맞으며 삶을 마무리하고 싶은 것은 누구나 마음속에 품는 꿈이다.

하지만 완주를 향해 가는 길에 한계는 언제나 찾아오는 법. '밥 잘 챙겨 먹고, 운동 열심히 하고, 건강하게 살기'와 같은 평범한 삶을 꾸준히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지역 치안 일선에서 형사와 수사관으로 34년째 근무하며 굵직한 사건을 맡아온 제주서부경찰서 여성청소년계 수사팀장 고명균 경감(58)에게도 어느 날, 그런 순간이 찾아왔다.

"매년 하는 경찰 체력장에서 제주시내에 있는 애향운동장을 네 바퀴 도는데, '웩' 하며 위산이 역류해 나오더라고요. 체력 만큼은 자신 있었는데...'아, 이래서는 안 되겠다'며 마음을 먹었죠."

■ 파출소·지구대서부터…치안 일선 지킨 34년 차 베테랑 경찰

고 경감은 1990년 처음 경찰 제복을 입은 이래, 이른바 '야전'에서만 30년을 넘게 구른(?) 베테랑 수사관이다. 교육청 행정직으로 처음 공직 생활을 시작했지만, '제복'에 끌린 그의 마음이 끝내 그를 경찰 사회로 발을 들여놓게 했다. "매형이 경찰관이셨어요. 제복 입고 근무하시는 모습이 참 멋졌죠. 그 때문에 경찰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멋쩍게 웃었다.

경찰 입직 후 14년간은 파출소와 지구대만 돌았다. 길거리에 쓰러진 술 취한 사람을 깨우고 층간소음을 중재하는 궂은 민원부터, 교통사고와 폭행·절도 등 각종 사건·사고 신고를 받고 밤낮으로 출동해 처리해야 하는, 그야말로 치안 최일선이다. 그런 와중에도 부지런히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신발이 닳도록 현장을 돈 덕분에, 2004년에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청소년 성매매범을 검거하기도 했다.

이 같은 공적으로 그는 1계급 특진과 동시에 2004년, 제주동부경찰서 강력팀 형사로 부름을 받는다. 2007년 제주서부경찰서가 신설되면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서부서에서 몇 년 더 강력팀 형사로 일했다. 2012년에는 제주 도심의 한 마사지업소에서 성매매를 한 제주도 공무원 20여 명을 대거 붙잡기도 했다.

"소년계(현재의 여성청소년계)에서 한 번 일 해보지 그래." 청소년 성매매범 무더기 검거와 공직자 성매수 사건 등 굵직한 관련 사건들을 처리한 그에게 "함께 일하자"며 상관이 손을 내밀었다.

■ 원조교제·성매매범 무더기 검거한 형사…'전국 1호 가정폭력 전문수사관' 되다

강력계 형사 생활을 마치고 2015년 2월, 그는 새롭게 만들어진 조직 '여청수사팀'의 수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의 '여성청소년계 수사팀장 고명균'을 만든 순간이다.

그는 '전국 1호 가정폭력 전문수사관'이기도 하다. 가정폭력 등 관련 사건이 빈발하며 전국적으로 사회적 문제로 떠오를 때였다.

"2018년에 본청에서 전국의 경찰관을 대상으로 '전문수사관' 지원을 받았어요. 그런데 3년간 다른 부서로 움직이지 못하고 '쭉' 일해야 한다는 조건 탓에, 지원자가 없었어요. 전국 청에서 저 혼자 신청하는 바람에 '전국 1호'가 된 거죠."

2018년 10월, 고명균 경감이 ‘전국 1호 가정폭력 전문수사관’이 되면서 받은 인증서


전문수사관 지원에 어떤 소명의식이라도 있었던 걸까? 고 경감은 "그저 맡은 일을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2017년쯤인가, 가정폭력 사건이 잦아 몇 달간 꾸준히 모니터링하던 동거인 남녀가 있었어요. 한 달에도 6~7차례 가해자(남성)가 폭력을 휘둘러 신고가 들어오는 탓에, 특별히 더 예의주시하던 가정이었죠. 피해자 보호와 함께, 더는 폭행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가해자도 자주 만나 상담하고, 교화 등에도 특별히 애를 썼어요. 피해 여성은 맞아서 눈이 붓고, 피해 정도가 컸는데도 '죽어도 자기는 사건 처리 안 하겠다'고 했기 때문이었죠...그런데 결국, 그 피해자가 폭행치사로 돌아가셨어요."

이듬해, 그는 경찰청 전국 공모에 자진해 손을 들어, 전국 첫 '가정폭력 전문수사관'이 됐다.

■ '건강' 때문에 시작한 달리기…동네 한 바퀴에서 마라톤 풀코스까지

밤낮없이 잠복 수사하고 사건을 처리하는 강력계 형사의 고달픈 삶 만큼이나, 갓 출범한 여청수사팀의 업무량도 만만치 않았다.

"2015년 2월 3일, 여청수사팀이 신설되면서 발탁됐어요. 그 당시 2인 1조로, 3개 팀이 3교대 근무를 했기 때문에 업무 강도가 셌어요. 3일 중에 하루 쉬고, 하루는 24시간 당직이었죠. 후배 경찰과 둘이서 한 팀을 이뤄 일했는데, 후배의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는 마음도 있어서 더 열심히 일했어요."

신설 조직에서 일을 맡고, 없던 업무 체계를 만들어가는 동안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체력은 된다"고 스스로 자부해왔건만, 쉼 없이 일하다 보니 눈 깜짝할 새 지천명(知天命)에 접어든 그였다. 해마다 실시하는 경찰 체력장에서 비로소 '한계'를 느낀 고 경감은 일단, 그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건강을 좀 챙길' 요량이었다. 사흘에 한 번꼴로 당직 근무를 서는 날, 경찰서 건물 뒤 주차장을 몇 바퀴 뛰었다. 주차장 한 두 바퀴가 스무 바퀴까지 늘었다. 매일 꾸준히 뛰자,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순간도 조금씩 늦춰지는 게 느껴졌다.

쉬는 날에는 집에서 제주 시내 또는 중산간 도로까지 오르막길을 내리 달렸다. 반년 만에 왕복 10km를 거뜬히 소화할 수 있는 체력이 됐다. 자연스레 '달리기 대회'에 눈길이 간 것도 그 이유에서다.

고명균 경감이 국내 3대 메이저 마라톤 대회 가운데 하나인 동아마라톤에 참가한 모습(왼쪽)과 춘천마라톤에서 뛰고 있는 모습(오른쪽)


"어느 날 보니 마라톤 대회라는 게 있길래 '한 번 나가볼까?'하는 마음으로 처음 참가한 게 2016년 서귀포에서 열린 감귤 마라톤 대회예요. 당시 10km 코스를 48분 만에 들어왔죠." 그가 처음으로 수확한 '달리기 대회 메달'이다.

10km 코스부터 '가볍게' 시작한 달리기 실력은 이윽고 42.195km의 거리에도 도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10km 15회·마라톤 풀 코스 완주 10회·65km 산악마라톤 1회 완주', 그가 2016년부터 2023년 10월 현재까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결과물이다.

고 경감은 경찰 수사와 달리기도 닮은 꼴이라고 했다. "수사를 하다 보면 피의자가 특정되기도 하지만, 특정이 안 되는 경우도 있어요. CCTV를 뒤져보고, DNA를 분석하다가도 어느 한 순간 뭔가를 놓치면 범인을 잡지 못할 수도 있고요. 처음부터 하나씩 다시 뒤져봐야 하는 경우도 생기죠. 달리기도 비슷해요. 방심하면 페이스를 놓치거나 호흡 조절이 힘들어지니까요."

고명균 경감이 2017년 제주도 한라산 정상과 주요 지점을 따라 65km를 달리는 ‘산악마라톤’(왼쪽)에 참가한 모습과 2016년 참가한 전국마라톤협회 주최 ‘제주 4Full 마라톤’. 제주도 해안선을 따라, 무려 4가지 마라톤 전 코스를 완주해야 하는 대회다.


■ 갈고 닦은 '달리기 실력'으로 줄행랑치는 성범죄자 잡기도

고명균 경감이 갈고 닦은 달리기 실력이 업무에서 빛을 발한 순간도 있었다. 2018년, 20대 남성이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만난 초등학생을 꾀어 불러내 유사강간한 사건이었다. 당시 피의자는 피해자를 유사강간한 것으로도 모자라, 소셜미디어를 통해 알아낸 피해자 정보를 이용해 "또 다른 친구를 불러오라"고 협박까지 하던 악질 성범죄자였다.

"당시 피의자가 사용했던 채팅 앱 운영사가 일본 회사였기 때문에, 압수영장을 신청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아이(피해자) 부모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마치 피해자인 척 피의자와 채팅을 해서 약속 장소로 유인해 붙잡기로 했죠."

고 경감의 수사팀이 계획한 대로, 이 20대 남성은 태연히 '만남의 장소'에 나타났다. 이내 경찰이 붙잡으러 왔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줄행랑쳤지만, 한라산 정상을 '뛰어 올라가' 찍고 내려오는 고 경감에게 당해낼 바가 아니었다. 피의자는 얼마 못 가 손쉽게 덜미를 잡혔다.

■ "내년 명예퇴직…다음 목표는 '세계 6대 마라톤' 완주"

경찰 제복에 대한 동경심으로 시작한 수사관으로서의 삶을 그는 마무리할 참이다. 고 경감은 내년 명예퇴직을 계획하고 있다. 그는 "제2의 인생을 살아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가 최근 세운 새 목표는 '세계 6대 마라톤' 정복이다. 일본 도쿄·영국 런던·독일 베를린·미국 보스턴·미국 시카고·미국 뉴욕 등 도시에서 매년 개최되는 42.195km 구간의 레이스를 모두 도는 것이다. 올림픽위원회 공식 홈페이지 정보에 따르면, 지금까지 이 모든 코스를 완주한 사람은 전 세계에서 만 명 뿐이다.

2019년 미국 시카고 마라톤에 출전한 고명균 경감이 태극기를 활짝 펼쳐보이고 있는 모습(왼쪽)과 지난해 독일 베를린마라톤에서 뛰고 있는 고 경감.


이미 시카고와 베를린은 정복했다. 코로나19 사태로 목표 달성이 조금 늦어진 것도 있다. 고 경감은 지난해 베를린 마라톤 완주에 이어, 2주 앞으로 다가온 '뉴욕 마라톤 대회' 준비에 여념이 없다. 이번 뉴욕 마라톤을 완주하면, 그가 목표로 하는 '6대 마라톤 완주' 꿈의 절반은 이루는 셈이다.

무엇이 그를 뛰게 하는 걸까.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3~4시간여 동안 그저 '쉼없이 달음박질하기 위해' 수백만 원에 달하는 왕복 비행기 푯값을 들여 십수 시간을 날아가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마라톤 풀코스 하나를 완주하고 나면 일단 뭔가 정복했다는 성취감이 들죠. 한동안은 (지쳐서) 다시는 뛰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아요. 이걸 해서 뭔 이득이 있나 하는 생각도 들고...그런데 며칠 지나면 다시 '달리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에서 꿈틀거려요. '또 어떤 달리기 대회가 있나?' 하며 찾아보게 되죠. 뛸 때만큼은 아드레날린이 마구 샘솟는다고나 할까요."

이미 국내 주요 마라톤 대회를 섭렵한 그는 세계 6대 마라톤 완주 목표에 더해, 42.195km 풀코스 완주 기록 단축도 목표로 두고 있다.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에게 꿈의 기록으로 불리는 이른바 Sub-3(서브 쓰리)다.

고명균 경감이 지난해 독일에서 열린 베를린 마라톤을 완주한 뒤, 메달을 목에 건 모습


"지난해 참가한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서 한창 달리고 있을 때였어요. 저 앞에, 한 4km 정도 완주 지점을 남겨두고 그만 다리에 쥐가 난 거예요. 항상 그 구간에서 쥐가 나더라고요. 절뚝거리며 1km는 걷고, 또다시 1km는 살짝살짝 뛰고, 걷다 뛰다를 반복하면서 시간을 보니, 이번에도 (기록 경신은) 안 되겠구나 했죠. 그런데 '출발점'에서 우연히 만난 한·독 커플을, 인파 속에서 다시 마주치게 된 거예요."

그의 옷에 붙인 태극기와 등 쪽에 새긴 한국어를 보고, 고 경감이 한국인임을 알아챈 이 국제 커플은 인파 속에서 고 경감을 향해 "빨리, 빨리!"를 연신 외치며 목이 터져라 응원해줬다. "다시 힘이 나더라고요. 덕분에 종점까지 다시 힘껏 뛸 수 있었죠."

1남 1녀를 둔 고 경감은 내년, 그를 닮은 딸과 함께 서울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함께 참가할 계획도 세웠다. 이미 제주에서 열린 대회에 아빠와 함께 두 번이나 달린 딸이다. "가족들의 응원 만큼 힘이 나는 건 없어요. 출발점에서 격려해준 아내와 아들·딸이 피니시 라인(결승선)에서 보이면, 힘이 마구 솟아나요. 전력 질주해서 마침내 완주하게 됩니다."

명예로운 은퇴를 앞둔 34년 차 베테랑 수사관인 그는 오늘도 달린다, 인생 제2막도 무사히 완주해내기 위해서.

지난해 세계 6대 마라톤 대회 중 하나인 베를린 마라톤에 참가해 완주한 고명균 경감(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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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소영 기자 (missionalist@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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