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소시스트, 남성·백인 중심 전설이 된 원작을 성찰하다
엑소시스트: 믿는 자
중동 이교도 악마 잡는 사제
1973년 ‘엑소시스트’ 기본 설정
‘믿는 자’, 흑인 여성 주술사 등
공동체 다양한 이들 ‘구마 연대’
1973년 작 ‘엑소시스트’는 전설이다. 대단한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것은 물론 평단의 호평 속에서 여전히 ‘최고의 공포영화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 작품이 영화 문화에 남긴 영향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수많은 아류작이 등장했고, 속편만 해도 5편까지 만들어졌다. 구마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부와 악마의 대결, 빙의된 자들의 뒤틀리고 오염된 신체, 불순한 언어 등은 ‘엑소시스트’의 상상력에 빚지고 있다.
‘엑소시스트: 믿는 자’(2023)는 이 걸작의 정통성을 잇는 후속작을 자임하는 또 한편의 영화다. 2018년, 1980년대 슬래셔 무비의 전성기를 열었던 ‘할로윈’(1978)의 속편을 제작하면서 호평을 받았던 데이비드 고든 그린 감독이 이번에는 구마물의 전설에 도전했다. 연쇄살인마가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해치는 슬래셔 무비는 비교적 복제 가능한 코드를 가지고 있는 반면, 선과 악의 경계를 탐구하며 인간의 근원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구마물은 ‘공기와도 같은 두려움’에 접근해야 한다는 점에서 만만치 않은 시도였을 것이다.
‘믿는 자’는 원작이 남긴 유산 안에서 장르 관습을 반복하고 뒤틀면서 나름 흥미로운 장을 열었고, 원작과는 사뭇 다른 세계관을 선보인다. 그러면서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함께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하는데, 덕분에 무섭다기보다는 성찰적이 된다. 이 패기 있는 도전의 성공 여부에 대한 평가가 사람마다 달라지는 이유다.
야만스러운 건 흑인 주술이 아니라
원작 ‘엑소시스트’는 이라크 북부의 한 유적지에서 구마 신부가 악마 ‘파주주’의 동상과 마주 보며 시작된다. 파주주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등장하는 악마인데, 서구 기독교 중심 세계관에서 보자면 이교도의 신인 셈이다. 그렇게 아랍 지역은 하나님의 뜻이 미치지 않는 이교도의 땅, 미개하고 죄가 서린 땅으로 그려진다.
파주주의 저주는 ‘타락한 도시’ 뉴욕으로 옮겨온다. 남편과 이혼한 뒤 혼자 딸 리건(린다 블레어)을 키우고 있는 크리스(엘런 버스틴)는 새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뉴욕으로 이사를 한 참이다. 새집에서 사랑스러운 딸이 갑자기 욕설을 내뱉고 온몸을 뒤틀며 발작을 일으킨다. 아버지가 없는 집에서 어머니와 딸은 ‘비정상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간악한 기운이 침투하기 좋은 공간으로 부상한다.
‘엑소시스트’는 2차 세계대전 뒤 유례없는 풍요를 누리며 보수화되었던 미국 사회가 1960년대 변혁의 시기를 지나면서 경험하는 문화적 전환과 그에 따른 가치관의 혼란을 공포의 자양분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악마 들린 소녀의 신체는 기독교와 이교도, 구세대와 신세대, 남성과 여성 등 전통적인 질서를 지탱했던 각종 이분법을 교란시키는 불온한 대상이 된다. 이런 혼돈을 바로잡을 수 있는 건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아들, 즉 남성 사제들이라는 설정은 지금 보면 꽤 낡았다. 50년이 지나 ‘믿는 자’에 깜짝 등장한 크리스가 리건에게 행해진 구마의식을 돌아보며 “가부장적 의례”라고 평가하는 건 일종의 블랙 유머다.
‘믿는 자’ 역시 ‘이국적인’ 나라에서 시작된다. 그곳은 바로 아이티. 할리우드 공포영화에서 일반적으로 사악한 부두교의 땅, 불가사의한 좀비의 땅으로 다뤄지던 나라다. 주인공 빅터(레슬리 오덤 주니어)는 만삭인 아내와 아이티를 여행 중이다. 그곳에서 아내는 흑인 여성 주술사의 축복을 받는다. 기존의 공포영화 문법에 익숙한 관객들이라면 이 ‘축복’이 불행을 가져올 것이라 기대하며 불안을 느낀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주술사의 기도가 결국은 ‘성스러운 기적’으로 이어진다는 걸 깨닫게 된다.
‘믿는 자’에서 야만스러운 것은 흑인들이 행했던 주술이 아니라 백인들의 노예무역과 노예제다. 아이티는 스페인에 이어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거쳤고, 이곳에서 대농장을 경영했던 백인 제국주의자들은 원주민을 멸종시킨 섬에 아프리카에서 납치한 흑인들을 정착시켰다. 그런데 18세기가 되면서 노예들의 혁명이 일어나고 세계사 최초로 흑인 근대국가가 건설된다. 이것이 아이티에서 행해진 놀라운 역사다. 그러나 이후 미국이 다시 아이티를 식민화했고, 미국 대중문화 속에서 아프리카 서부에서 납치돼 서인도제도로 팔려온 흑인들과 함께 들어온 부두교와 그 사제(주술사)는 악마화되어 버렸다. 백인 중심의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의 종교가 가진 역능은 폄하되고 축소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믿는 자’가 흑인 여성 주술사의 존재를 반복적으로 등장시키면서 도전하는 고정관념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다. 덕분에 우리는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일궈온 문화의 힘을 그 영적 세계 안에서 새롭게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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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여전한 공포 ‘인종차별’
‘믿는 자’는 이처럼 지정학적 스테레오 타입, 인종 및 젠더 재현, 그리고 종교의 의미 등을 새롭게 탐색한다. 그러므로 ‘믿는 자’가 원작 ‘엑소시스트’와 극적으로 달라지는 부분은 구마의식 그 자체다. 원작에서는 두명의 권위 있는 남성 사제가 행했던 구마의식을 이제는 빙의된 두 소녀를 구하고자 하는 공동체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이어받는다. 고뇌에 찬 남성 사제가 악마와 독대하는 고독한 싸움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하는 공동체적 의례가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니, 영화가 무섭지 않은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어설픈 모사품에 불과한가?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진보적인 (대체로 백인) 남성 지식인들은 “트럼프가 미국 헤게모니가 지배하는 세계 질서를 교란시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며 흥분했다. 하지만 지식인들이 자신의 안전한 책상 앞에 앉아 까부는 동안, 미국의 길거리엔 케이케이케이(KKK) 복장을 한 백인들이 자축 행진을 했다. 트럼프 당선은 누군가에겐 비평의 대상이 되지만, 누군가에겐 정당한 권리의 실현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생존을 위협하는 일이 된다. 영화는 이런 시대를 배경으로 삼는다.
영화에서 흑인인 빅터의 딸 앤절라가 실종되었을 때, 나는 백인인 캐서린이 함께 실종됐다는 사실에 어쩐지 안도했다. 미국 사회가 소녀들의 실종을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감각을 만들어내는 인종차별은 그 자체로 공포다. 그렇지 않은가.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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