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보수의 결벽증 혹은 딜레마 [노원명 에세이]
포크너의 문장은 심오하고 어려워 진도를 빼기 어렵지만 곳곳에 보석처럼 빛나는 이미지들로 넘쳐난다. 사랑과 슬픔의 유효기간을 채권 만기에 견준 비유는 무릎을 치게 한다. 요사이 한국 보수진영의 여론 동향을 지켜보노라면 윤석열 정부에 대한 ‘애정 채권’에 만기 도래한 사람들이 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그 만기는 짧기도 하다.
지지층의 변심은 모든 정권이 다 겪는 것이다. YS정권과 DJ정권의 어지럽던 말기를 기억한다. 국민 지지를 먹고 큰 왕년의 투사들은 측근과 아들들이 줄줄이 붙잡혀 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다. 노무현 정권은 팬덤정권이었지만 일찌감치 지지율이 10%대로 곤두박질쳤다. 이명박 정권은 인수위 시절부터 오만함(가령 ‘아륀지’ 발언 같은 것)으로 ‘그렇게 잘나셨어?’ 반감을 사더니 집권 1년 차에 미국산 쇠고기 파동으로 쫓겨날 뻔했다. 박근혜 정부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보도 몇 번에 사과를 몇 번 하더니 실제 쫓겨났다. 지지율은 5% 안팎까지 떨어졌다.
이때까지는 실정에 대한 맹렬한 분노라는 점에서 좌우 구분이 없던 시절이었다. 자기가 찍었든 안 찍었든 당장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면 돌아서는 순수의 시대랄까, 격정의 시대랄까. 진선진미한 권력을 바라는 터무니없는 기대는 한국인들의 보편적 특성이었다. 번번이 배신당하면서도 그들은 그 기대를 놓지 않았다.
그 특성에 좌우 분기가 온 것이 문재인 정권 때였다. 문 정부는 노무현보다 분열적이고, 그러함에도 노무현 정도의 업적을 찾을 수 없는 시끄럽고 한심한 정권이었지만 40%대 지지율이 마지노선처럼, 콘크리트 벽처럼 끝까지 갔다. 그것은 한국 좌파의 사고와 전략 변화를 의미했다. 좌파는 노무현 퇴장 이후 두 번의 보수 정권을 거치며 ‘아무리 무능한 좌파 정권도 어떤 우파 정권보다 우월하다’는 확신을 갖게 된 듯하다. 그런 신념적 좌파가 DJ나 노무현 때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때는 결코 바뀌지 않는 좌파의 비율이 10~20%였던 것이 문재인 정권 때는 40%가 됐다. 어마어마한 변화다. 좌파 정권에 대한 이들의 헌신은 만기가 무한정 연장되는 채권과도 같다.
한국 보수는 아직 순수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들의 ‘애정 채권’은 너무 빨리 만기가 돌아온다. 윤 정부 출범 이후 지난 정권과 이재명 민주당만 공격하던 칼럼니스트가 강서구청장 보선에서 여당이 패하자 ‘윤 정부 태도가 애당초 글러 먹었다’고 뜨악한 칼럼을 올린다. 이런 표변은 비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린치 같다. 그러게 미리미리 경고도 좀 하고 그럴 것이지 금지옥엽이야 할 때는 언제고 밖에서 맞고 온 아이의 등짝을 후려치는가. 이것이 보수진영의 정서 변화에 기반한 것이라면 조만간 30% 지지율도 붕괴할 것이다. 좌파와 달리 우파의 지지는 한 임계점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경향이 있다.
여기 두 개의 부모 유형이 있다. 잘못해도 내 새끼니까 무작정 감싸는 부모가 있고 몇 번 실패한 자식에 실망하여 ‘너도 안 되겠다’고 냉담해지는 부모가 있다. 부모 대접을 받으려면 후자 쪽이 유리하다. 아주 엇나가 버릴 위험이 있지만 그래도 부모 무서운 줄은 알 테니까. 한국이 짧은 민주주의 역사에도 권위주의와 일찌감치 멀어진 데는 변덕스럽고 무자비한 국민성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가정에 같은 훈육 원칙이 작용하던 시절의 얘기다. 지금 일부 가정은 ‘우리 0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하고 아이를 가르친다. 잘난 구석은 찾아보기 어려운 아이들이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는데 내 자식은 그 옆에서 풀 죽어 있다.
생각해보면 모든 부모가 자식에 엄하던 시절이 그나마 나았다. 그때 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기대는 비현실적으로 높아서 모든 자식이 불행해졌다는 단점은 있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착했다. 보수는 그 결벽적 훈육 방식을 버리지 못했고 좌파는 오래전에 버렸다. 좌파의 훈육 방식을 따라가자니 세상이 뒷걸음치는 것 같다. 그대로 있자니 세상이 온통 좌파 아이들의 무대가 되고 내 아이만 도태될 것 같다. 그게 지금 한국 보수의 딜레마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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