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혐오 조장" 난립한 현수막 철거는 위법?…해법 마련 절실
시민 "청정구역 같아" 반색…행정안전부 "옥외광고물법 개정이 먼저"
(전국종합=연합뉴스) 정당의 정책이나 정치 현안 관련 현수막은 신고하지 않아도 설치할 수 있는 옥외광고물 등의 관리와 옥외광고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옥외광고물법) 개정안 시행으로 인해 전국 거리가 '현수막 공해'로 몸살을 앓고 있다.
정당 현수막이 급증하면서 시민 안전을 위협하고,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민원이 덩달아 폭증하면서 일부 지자체는 '강제 현수막 철거'를 허용하도록 조례를 정비하며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옥외광고물법의 주무 부처인 행정안전부가 '지자체의 조례가 상위법에 근거하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취지로 제동을 걸면서 서로 간 갈등이 빚어져 근본적으로 옥외광고물법을 재개정하지 않는 이상 문제가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불편", "안전 위협"…민원 급증에 참다못해 철거 나선 지자체
정당 현수막을 철거해달라는 민원이 급증한 건 지난해 12월 11일 옥외광고물 개정안을 시행하면서부터다.
문제의 법 조항은 제8조 8항 '정당이 통상적인 정당 활동으로 보장되는 정당의 정책이나 정치적 현안에 대해 (광고물을) 표시·설치하는 경우 허가·신고 및 금지·제한에 관한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라는 조항이다.
이때부터 원색적인 비방이나 막말이 담긴 정당 현수막이 거리를 뒤덮으면서 지자체에 민원이 빗발쳤다.
이에 가장 먼저 적극적인 대응에 나선 건 인천시다.
인천시는 지난 5월 전국 지자체 최초로 조례를 개정해 조례 위반 정당 현수막을 강제로 철거하고 있다.
또 지정한 게시대에 걸 수 있는 정당 현수막을 국회의원 선거구별 4개 이하로 제한했다.
인천시가 시민 2천명을 대상으로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 87.5%가 조례를 위반한 정당 현수막 강제 철거에 동의했다.
시민 과반수는 '정당 현수막 때문에 불편을 느꼈다', '정치 혐오를 조장한다', '생활 환경과 안전을 해친다'는 등 정당 현수막에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냈다.
행안부는 인천시의 조례에 대해 '상위법에 위임이 없어 위법하다'며 대법원에 조례 집행정지 신청을 냈지만, 대법원은 지난 9월 이를 기각했다.
행안부가 대법원에 제소한 뒤에도 정당 현수막 정비를 계속해온 인천시는 대법원 결정에 힘입어 조례 위반 현수막 정비를 지속하고 있다.
인천시의회는 역으로 정당 명의 현수막 설치를 합법화한 현행 옥외광고물법에 대한 위헌 여부를 가려달라며 지난 7월 대법원에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했다.
인천시 관계자는 "무분별한 정당 현수막 규제에 관한 시 조례가 대법원의 인정을 받으면서 법률적으로도 근거가 생겼다"며 "이 조례처럼 시민 불편을 개선할 수 있는 정책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인천 이후 다른 지자체도 개정 박차…행안부 "법령 위반" 우려
인천시의 조례 개정 사례를 계기로 다른 지자체에서도 정당 현수막을 규제하는 조례 개정이 이뤄지고 있다.
행안부가 지난 5월 어린이·노인·장애인보호구역 등엔 정당 현수막을 설치하지 못하도록 하는 가이드라인을 내놨으나 법적 구속력이 없어 민원이 여전히 빗발치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시의회는 지난 20일 본회의를 열고 '대구광역시 옥외광고물 등의 관리와 옥외광고산업 진흥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 조례안'을 제정했다.
개정안에는 정당 현수막 설치 장소를 '지정 게시대'로 한정하고 게시 개수 또한 '공직선거법'에 따른 국회의원 선거구별로 4개 이하로 제한하며 혐오·비방 내용을 포함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부산시의회도 지난달 25일 정당별로 읍·면·동마다 현수막을 1개만 게시하도록 하는 내용 등을 담은 옥외광고물 관련 조례를 통과시켰다.
광주시 역시 정당 현수막을 행정동마다 4개까지 지정 게시대에 설치하도록 조례를 개정하고 일제 정비를 하고 있다.
전남 순천시도 정당 현수막을 지정 게시대에 걸도록 하고 개수도 (동별로) 5개 이내로 제한하는 내용의 조례 개정안을 입법 예고한 상태다.
울산시도 다른 지자체와 비슷한 취지로 지난달 옥외광고물 조례를 개정했다.
이들 지자체는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계류하자 선제적인 조치 차원에서 이 같은 개정안을 마련했다.
"도심 미관 저해와 상가 피해, 교통안전 문제를 초래하는 무분별한 현수막 설치는 제한할 필요가 있다"라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그러나 옥외광고물법을 담당하는 행안부는 이들 지자체의 행보에 제동을 걸고 있다.
옥외광고물법이 위임하지 않은 장소, 개수 등 사항을 조례로 규정하는 것은 법령 위반이라는 이유에서다.
이에 지자체에서 옥외광고물 조례 개정을 시도할 때마다 재의를 요구하고 있으나 지자체들은 인천시 사례를 근거로 조례 개정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다.
현수막 난립 막을 근본 해결책은 옥외광고물법 재개정뿐
시민들은 정당 현수막 정비를 반기는 분위기다.
울산 울주군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한 상인은 "올해 들어 가게 앞에 정당 현수막이 빼곡히 붙으며 입구를 못 찾겠다는 손님도 많고 장사가 잘 안됐다"며 "현수막을 다 뗀 지금은 꼭 청정구역 같다"고 반색했다.
단속 현장을 지켜보던 시민 김모(62)씨는 "상대 정당을 향해 비방하는 말, 심한 말을 현수막에 써서 걸어놓는 경우가 많았다"며 "그런 현수막을 보면 정치혐오가 생길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이제 깔끔해 보인다"고 말했다.
다만 조례 개정안이 상위법인 옥외광고물법과 상충하는 문제는 아직 남아있는 상태다.
울산시 관계자는 "행정안전부에서 재의 요구가 왔으나 도시환경과 보행자 안전 확보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 수용하지 않기로 했다"며 "향후 행안부가 조례 무효 확인 소송 등을 낼 것으로 보이지만, 사법부 결정이 나오기 전까지는 지속해 일제 정비를 시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결국 해결을 위해서는 옥외광고물법 개정이 필수다.
국회 의안 정보시스템상 올해 들어 22일 현재까지 발의된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은 총 17건이다.
행안부 관계자는 "옥외광고물법상 정당 현수막의 개수를 제한하는 시행령을 만들 수 없어 정당 현수막으로부터 초래되는 국민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옥외광고물법 개정이 전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안전사고 발생 등 국민 불편을 적극적으로 예방하기 위해 지자체·선관위·정당 등의 의견수렴을 거쳐 현장에서 적용을 권고하는 가이드라인을 마련했지만, 결국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빨리 통과돼야 정당 현수막의 무분별한 난립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민재 백도인 고성식 오수희 박세진 장아름 이우성 김선경 장지현 박영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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