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써야 하나”…의대 파격 증원에 ‘울 곳’ 따로 있다는데 [방영덕의 디테일]
정부가 의대 정원 확대 방침을 밝히면서 반도체업계 및 관련 학계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의사들이 파업해야 하는 게 아니라 공대 교수들이 해야되는 것 아니냐”란 말까지 들립니다.
정부는 현재 의료 붕괴 상황을 막기 위해 오는 2025학년도 대학입시부터 의대 입학 정원을 1000명 상당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반도체업계에서 인력난을 우려합니다.
의대 정원 확대와 반도체업계의 인력난 관계가 언뜻 이해가지 않는데요. 아하, 앞서 반도체업계 관계자가 한숨 속 내뱉은 말에서 빠진 말이 있었네요. “가뜩이나 (의대로 빠져나가) 미달인데”라는 겁니다. 자세히 알아봤습니다.
최근 공개된 2024학년도 대학 수시 경쟁률에서도 주요 대학의 의대 평균 경쟁률은 46대 1로 지난해보다 높았습니다. 반면 반도체 등 첨단학과의 평균 경쟁률은 16대 1 수준으로 의대와 큰 격차를 보이고 있습니다.
앞서 반도체학과 등록을 포기한 상당수는 의대, 치대, 한의대, 수의대, 약대 등으로 빠져나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반도체학과는 대기업과 연계된 채용조건형 계약학과로 졸업 후 취업을 보장 받습니다. 그것도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같은 대기업 취업 보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격한 대학 등록을 포기하는 이유는 매우 현실적이더라고요. ‘일반 샐러리맨이냐, 전문직이냐’란 기로에서 샐러리맨이 밀리는 것이죠.
“씁쓸하지만 사실입니다. 반도체기업 직원들에겐 의학계열만큼의 보상이 따르긴 어렵고, 직업적 안정성 또한 보장되지 않으니까요.” 최근 만난 한 반도체 기업 관계자의 말입니다.
그는 이어 “그래도 반도체학과에 의대 갈 실력의 인재들이 몰린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란 평가가 나왔는데, (의대 정원 확대로) 최상위 인재들이 의대로 더 쏠리면 국내 반도체 산업은 외국인으로 채워질 우려가 크죠”라고 덧붙였습니다. 지나친 걱정일까요?
하지만 매년 대학이나 대학원 등에서 배출되는 반도체 산업 인력은 5000명 이하 수준인데요. 이 같은 수준이 지속될 경우 2031년에는 무려 5만4000명의 인력이 부족할 전망입니다.
반도체 산업 성장속도를 인력 수급이 따라가지 못해 생기는 인력난인데, 경쟁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는 미국 내 반도체 일자리가 2030년까지 11만 5000개로 늘어나지만, 이 중 6만 7000개가 채워지지 않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반도체 기술은 미국과 중국간 패권 전쟁에서 핵심으로 부상했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은 반도체 기술 육성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붓고 있는 한편 미국은 삼성전자, TSMC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을 자국내 공급망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막대한 보조금을 풀고 있는데요. 인력난이 복병입니다.
반도체 시장에서의 옛 영광 회복을 위해 적극 나선 일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전자정부기술산업협회(JEITA)에 따르면 도시바, 소니 등 주요 기업에 3만5000여명의 인력이 더 필요한 실정이라고 합니다.
한국 뿐 아니라 미국, 대만 등 주요 국가 기업들이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투자를 연기했거나, 생산 시설 가동에 차질을 빚는 사례가 종종 발생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최근 대만 1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TSMC는 미국 애리조나에 짓는 공장의 가동 시점을 2024년에서 2025년으로 연기했습니다. 대만 TSMC 애리조나 공장 건설은 미국 반도체 첨단 공급망 재건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결국 첨단장비를 설치할 수 있는 숙련 인력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1년여 정도 공장 가동이 늦어지게 됐습니다.
인력 부족에 따른 인력 유출문제도 큽니다.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은 지난 2월 한림대 도헌학술원 개원 기념 학술심포지엄에서 “마이크론이 인재를 똑똑하게 만들어 놓으면 인텔이 데려가고, 마이크론은 그 빈자리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사람을 뽑아간다. 인텔이 키워놓은 인재는 구글이나 엔비디아로 간다”며 경쟁업체 간 인재 쟁탈전이 치열함을 토로했는데요.
반도체 산업의 인력난은 단순히 반도체 전문인력을 뽑지 못하는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죠. 국가의 기술 경쟁력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현재 반도체 산업이 우리나라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에 달합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의대 정원 확대가 반도체 인재 확보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다수의 비수도권 대학교에 의대가 설치되면 의대 지원 수요와 서울 최상위권 대학교 내 반도체학과 등 공대 진학을 원하는 수요가 크게 겹치지 않을 것이란 전망에섭니다.
또 의대 정원 확대로 의사들이 늘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전문직 의사로서의 메리트가 떨어질 수 있습니다. 과거 로스쿨이 생기고 변호사수가 늘면서 오히려 법조인 쏠림 현상을 일부 완화시켰던 것처럼요.
인력양성은 장기전입니다.
반도체 인력 확보 문제가 의대 정원 확대 등과 같은 외부 변수에 더 이상 취약하지 않도록(사기가 꺾이지 않도록) 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합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현재 미국, 유럽, 일본, 한국, 대만 등 반도체 70년 역사에서 가장 치열한 투자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데 동의합니다. 아마 앞으로 10년 동안은 이 경쟁이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과거 미국이나 유럽, 일본이 반도체 제조를 포기했던 것은 인재부족 탓이었다”며 “미래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 유지를 위해 반도체 고급 인력 양성 등 국가적 역량을 총집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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