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왕' 숨졌지만 공범은 있다…'세입자 울린 수법' 끝까지 팠다
[편집자주] 한 번 걸리면 끝까지 간다. 한국에서 한 해 검거되는 범죄 사건은 113만건(2021년 기준). 사라진 범죄자를 잡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이 시대의 진정한 경찰 베테랑을 만났다.
지난해 10월13일. 단군 이래 최대 규모 '전세사기꾼'으로 불리는 '빌라왕' 김모씨(당시 42세)가 서울 종로구 한 호텔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심장마비. 경찰 수사 중 피의자가 사망하면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를 종결해야 한다. 수사 대상이 사라져 수사를 끝낸다는 의미다.
안성근 수사관(31)과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금수대) 2계 3팀 소속 6명의 수사관은 피의자가 숨진 뒤에도 9개월간 수사를 진행해 빌라왕의 범행 수법을 규명하고 공범의 존재 등 범죄의 종합적 실체를 밝혔다.
경찰은 김씨가 숨지기 한 달 전부터 인터넷 피해자카페 등을 통해 그가 '무자본 갭투자' 수법의 전세사기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당시 경찰이 확인한 피해자는 100여명 수준. 김씨는 숨질 때까지 경찰이 자신을 수사 중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 경감과 수사팀은 김씨 사망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유족을 찾아 김씨가 쓰던 휴대폰 5대를 넘겨받았다. 김씨 휴대폰에서 2015년부터 주고받은 문자메시지 약 43만개를 확보했다. 또 228개의 금융계좌 거래 내역, 피해자 등 관련자 566명의 진술을 종합해 분석했다.
수사팀 전체가 9개월간 오후 11시를 넘겨 퇴근하면서 주말도 반납해야 했다. 검거한 62명의 수십만건의 금융거래 내역과 문자메시지, 통화 녹음, 김씨 소유 모든 주택의 부동산등기부등본, 세입자의 은행거래 기록 등을 맞춰가며 사망한 김씨의 행각을 재구성했다.
경찰이 밝혀낸 김씨의 범행 수법은 간단했다. 브로커 역할을 했던 전 법무사사무실 사무장 강모씨(47)와 부동산중개보조원 조모씨(40) 등의 지시를 받은 공범들이 부동산 등을 돌아다니며 2억원에 주택을 팔겠다고 내놓은 집주인을 찾아간다.
이들은 "그러지 말고 2억3000만원에 전세를 받아라, 우리가 세입자를 구해 오겠다"며 "전세계약을 하고 나면 2억3000만원에 부동산 매매 계약서를 작성해 소유권 넘겨받을 사람도 구해줄테니 3000만원은 우리에게 달라"고 설득했다.
브로커는 아무것도 모르는 전세 세입자를 구해 2억3000만원에 집주인과 전세계약을 맺게 한다. 확정일자를 받고 계약에 효력이 생기는 당일 브로커들은 집주인이 김씨에게 대금 2억3000만원을 받고 주택을 매매했다는 계약서를 작성해 준다. 실제 집주인과 김씨 사이에 주택 매매 대금은 오고 가지 않는다. 김씨는 브로커들에게 주택거래를 위한 명의만 빌려줬고 집주인이 계약한 전세임대차 계약을 승계할 뿐이다.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입금한 전세보증금 2억3000만원 중에서 브로커는 집주인으로부터 본인들 몫으로 3000만원을 넘겨 받는다. 그리고는 전세세입자 등을 구해온 공범에게 '리베이트' 명목으로 범행 수익을 분배했다.
본래 2억원에 빌라를 팔 계획이었던 집주인은 손해볼 게 없는 셈이다. 그러나 전세 세입자들은 계약기간이 끝나는 시점에서야 자신의 집주인이 바뀐 걸 알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김씨는 생전 60억원의 세금을 체납했고 신용등급은 8~9등급 수준인 신용불량자였다. 애초에 전세 보증금을 돌려줄 능력이 없음에도 주택 1500여채를 돈 한푼 안 받고 사 모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씨는 브로커들에게 '명의비' 명목으로 주택 1채당 150만~300만원을 받는다. 안 경감과 수사팀은 이런 수법으로 김씨가 약 19억5000만원의 범죄수익을 거둔 것으로 파악했다. 김씨는 강씨와 조씨 뿐 아니라 경기 수원, 인천 등에 거점 역할을 할 부동산중개사무소를 두고 매물을 물색했다.
김씨와 가장 많은 매물을 거래한 브로커 강씨 역시 이 같은 수법으로 약 6억~7억원의 범행수익을 얻은 것으로 드러났다.
안 경감은 수사를 하며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빌라왕의 실체도 확인해 검거했다. 브로커 강씨와 조씨는 김씨가 숨지기 전 "난 감옥에 갔다오면 된다" 등의 발언을 하자 더 이상 전세사기를 지속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제2, 제3의 빌라왕을 꿈꾸는 60대 여성 변모씨와 40대 여성 송모씨를 포섭했다.
송씨와 변씨는 각각 358채, 176채의 주택을 명의비만 받고 넘겨받았다. 이들이 명의비 명목으로 얻은 범행 수익은 송씨가 1억7000만원, 변씨가 1억9000만원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들로 인해 현재까지 확인된 전세사기 피해자만 283명, 피해금액은 609억원에 달한다.
안 경감은 "김씨가 숨지자 피해자들 사이에서 배후세력이 있고 김씨는 '바지'일뿐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수사를 통해 확인해 보니 김씨가 주도적으로 의사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이어 "경제와 기업 범죄를 수사하고 싶어서 경찰이 됐다"며 "전세사기와 같은 일반 서민들을 상대로 하는 범죄를 뿌리 뽑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정세진 기자 seji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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