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B컷]봉인해제된 간첩파일? 사본 아닌 원본 재생된 이유는
2006년 일심회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586 운동권 출신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공작원에게 민주노동당 내부 정보 등을 누설한 사건입니다. 피고인 마이클 장은 조선로동당에 충성서약을 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해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기도 했죠. 이 사건으로 민노당은 사실상 해체되고 진보신당의 창당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일심회 사건 피고인 중 한 명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던 이정훈(60)씨가 또다시 법정에 섰습니다. 혐의는 국가보안법 위반(회합·통신등)으로, 이씨는 2017년 일본계 페루 국적으로 위장한 북한 공작원 고니시와 4차례 만나 지령을 받고 국내 동향을 보고했다고 합니다.
재판은 이씨의 간첩활동 사실을 증언한 증인신문을 거쳐, 이씨와 고니시가 만나는 장면이 담긴 영상파일에 대한 증거조사를 하는 중입니다. 국보법 사건이 늘 그렇듯 증거능력에 대한 검찰과 피고인 측의 다툼이 몇 달째 이어지고 있는데, 이번주 법정B컷에서는 이 과정을 자세히 전해드리겠습니다.
檢 vs 국보법 피고인 간 해묵은 갈등…봉인된 파일도 못믿겠다?
지난 16일 이번 재판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도 있는 증거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습니다. 바로 국정원이 이씨와 고니시가 접선하는(?) 장면을 캠코더로 몰래 찍은 영상파일이었죠. 이 영상파일을 증거로 인정받으려면 법정에서 재생하는 방식으로 조사해야 하고, 이를 위해 검찰은 어떠한 조작도 하지 않은 파일이라는 것부터 증명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국정원 직원 두 명이 나와 '봉인해제' 작업에 나섰죠. 하지만 아무 갈등 없이 순탄하게 이뤄지면 국보법 공판이 아닐 테죠. 변호인과 검찰 측은 재생 방식을 놓고 또 아웅다웅하기 시작했습니다.
2023. 10. 16 서울중앙지법 형사18단독 국보법 위반 공판 中 |
재판부: 국정원 두 분 출석하라고 하시죠. 변호인: 그 전에 잠깐만요. 방금 제출한 SD카드 파일은 비정상적 방법으로 취득해서 그런지 청취가 너무 곤란합니다. 검사가 제출한 녹취록을 보면 (재판부로 하여금) 주관적 인상을 갖고 듣도록 만드려는게 아닌가, 의도적 조작으로 보이는 부분이 많습니다. 피고인 측에서도 녹음파일 속기사무소에 맡겨서 녹취 시도를 했는데 속기사가 대단히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유사 사건, 이른바 내란음모 사건 때 강연 녹음이 쟁점이었는데 그때 변호인 측에서 400곳 넘는 오류를 지적했습니다. 검사와 국정원이 녹취록 중 정확히 272곳을 수정해 제출했어요.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강연에서 '전면전은 안 된다'고 했는데 '전면전을 해야 된다'고 조작한 게 밝혀져 누더기가 됐습니다. 검찰: 변호인께서 오늘 제출한 의견서에 비정상적 방법으로 취득했다고 되어있는데 어떤 의미인지 얘기해주시면 그에 대한 의견을 드리겠습니다. 변호인: 검사는 피고인이 공작원과 만난 자리라는 것을 전제하고 얘기하는데, 저희는 어떤 기관인지 모르지만 프락치에 의한 함정 수사의 일환이라는 측면으로. 검사님, 제 말씀 들으세요. 검찰: 듣고 있습니다. 저는 변호인과 직접 대화하고 싶지 않고… 재판부: 검찰에서 비정상적 방법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고 했고 변호인이 말씀했습니다. 변호인: 검사 의견 중에 사본 재생을 얘기하는데 재판부: 유사 사건에서 원본과 사본 해시값이 동일한 게 확인되면 사본 재생도 많이 하는데요. 변호인: 원본을 재생하자는 이유가, 사본 만들때 청취 편의를 위해 뭔가 손댔다는 취지의 의견을 내셨거든요. 그 이유에서, 해시값 여부 상관없이 원본을 재생하는 것이 맞습니다. 재판부: 편집된 게 있나요. 검찰: 없습니다. 재판부: 원본 재생 무방합니다. 해시값부터 확인하시죠. 봉인해제 하시고 |
해시값이란 일종의 디지털 지문으로, 원본을 그대로 복사한 사본은 동일한 해시값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지장을 찍으면 지문 그대로 찍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도 변호인 측에서는 "두렵다"며 "국정원 보유 기술이 어느 수준인지 저희는 모르지 않느냐"고 원본 재생을 고집했죠. 이전 사건에서도 정반대 내용이 녹취록에 들어갔다니 이해 못할 바는 아닙니다.
검찰은 머쓱, 피고인은 우쭐…왜?
변호인의 항의가 있었지만 재판부가 통상 절차에 따라 진행하겠다며, 현장에서 사본을 복사하는 방식으로 '봉인 해제' 작업은 가까스로 시작했습니다.
노란 서류봉투 안에 빨간 테이프로 봉인된 은색 봉투가 나왔습니다. 재판부와 변호인이 차례로 봉인 상태를 확인한 뒤 테이프를 떼고 나니 문제의 SD카드가 모습을 드러냈죠. 흔히 볼 수 있는 32기가짜리 SD카드였습니다.
2023. 10. 16 서울중앙지법 형사18단독 국보법 위반 공판 中 |
국정원 직원: 저희가 '타블로'라는 국제적 수사기관에서 다 쓰는 물리적인 '쓰기 방지 장치'입니다. 여기에 SD카드를 연결해서 원본의 훼손을 막고 '인케이스' 프로그램을 사용해 해당 파일 해시값을 산출하겠습니다. 이 파일이 변경되면 해시값이 변경되고요. (10분쯤 뒤) 해시값 구해졌습니다. 파일 생성시각은 2017년 4월 15일 14시 51분 56초입니다. 이 원본 파일과 동일한 사본 파일을 새 usb에 복사해서 증거조사를 하려고 합니다. |
법정에 직접 복사 기기까지 들고 온 국정원. 국정원 설명대로라면 그렇게 복사한 사본 파일의 해시값은 원본과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해시값은 달랐습니다.
국정원 측은 "복사할 때 정상적으로 되지 않은 것 같다"며 다시 복사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또다시 10분이 흘렀고 그렇게 사본이 만들어지는 것 같았는데, 아뿔싸. 해시값은 이번에도 같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변호인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검찰과 국보법 피고인 사이 오래된 불신이 터질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2023. 10. 16 서울중앙지법 형사18단독 국보법 위반 공판 中 |
국정원 직원: 복사 과정에서 해시값이 달라지는 부분이 있어서, 말씀하신 것처럼 원본에서 재생하는 방식으로 진행할게요. 재판부: 원본 훼손 가능성은 없나요? 변호인: 그럼 입증된 것 아닌가요? 사본도 원본과 해시값이 동일하게 나와야 하는 거잖아요. 사본으로 재생하겠다는 주장이 그럼 원천적으로 잘못된 건데 이 부분 설명해 주셔야죠. 재판부: 검찰에서 미리 사본을 준비해 왔는데 해시값이 다르다면 변호인 주장이 설득력 있지만, 지금은 기술적 오류 같은데요. 변호인: 그렇게 재판부가 말씀하시면 안되는 것이, 사본 만들면 해시값이 같았어요. 사본으로 재생한 적 있어요. 이러면 저희로서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작에 의심이 가는 거죠 재판부: 그럼 원본으로 증거조사 하면 되잖아요. 변호인: 구태여 사본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가 재판부: 검찰, 특별한 이유 있었어요? 검찰: 관행에 따라 그랬는데, 지금 알 수 없는 이유로 해시값이 달라져서 재판부: 원본 재생하죠. 괜히 시간만 허비했네요. |
재판부 말마따나 기술적 문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증거를 조작하려고 했다면 굳이 쓰기 방지 장치를 법정에 갖고 와서 사본을 만드는 절차를 두 번씩이나 시도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이런 일이 종종 있는지에 대해 공통된 답변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검찰에 조작 의도가 없었다고 보이지만, 어찌 됐든 피고인 입장에서는 항의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이 영상은 국정원이 이씨를 미행하다 포착한 것으로 보였거든요.
접선 장면 공개됐지만…
우여곡절 끝에 재생된 SD카드 영상파일. '국보법 재판에선 통상적인 재판보다 변호인의 항의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이번에도 변호인은 또 항의했습니다. 동시에 녹취파일을 재생하는 법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음질이 조악했거든요.
2023. 10. 16 서울중앙지법 형사18단독 국보법 위반 공판 中 |
변호인: 재판장님, 이게 무슨 말인지 들리십니까? 녹취된 내용대로 들리세요? 재판부: 저는 지금까지 들었어요. 감안해서 듣겠습니다. 변호인: 검사가 제출한 녹취록대로 들으셨어요? 재판부: 녹취록이 아니라 녹취록과 녹음파일을 확인해서, 물론 (녹취록에 어느 정도)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도 못하면 제가 어떻게 증거조사를 합니까. 변호인: 대부분 내용이 왜곡된 거에요. 재판부: 저도 집중해서 듣고 있습니다. 변호인: 녹취록 보지 마시고 그냥 들어보세요. 재판부: 안 보겠습니다. |
검찰도 이같은 문제를 조금이나마 해결하기 위해 법원 증거조사 전 가능한 선에서 음질 개선 작업을 거치기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통화 녹음을 한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 몰래 녹음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조악한 음질인 경우가 대다수죠.
판사들은 더욱 난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녹취록을 보면 이렇게 말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모호한 순간도 있다고 하고요. 그때마다 판사들은 '녹취록 없이도 정말 녹취록대로 들리는지' 끊임없이 냉철하게 판단하는 것 말고는 딱히 뾰족한 수는 없다고 합니다.
다만 우리도 공공장소에서 음악을 듣는 것보다 이어폰을 꽂고 혼자 들으면 더 잘 들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판사들 역시 사무실에서 다시 한 번 집중해 듣는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증거 능력을 판단하게 됩니다. 지난 16일 공판에서 변호인은 재차 "어떻게 들리느냐"고 재판부에 독촉하듯 물었고, 다소 질린 듯한 재판부가 "판결로 얘기하겠다"고 한 것은 이런 뜻에서겠죠.
이번 사건 뿐만 아니라 최근 언론에 자주 보도되는 재판들 중에서 녹취파일로 옥신각신하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의원의 재판에서도 음질 문제가 쟁점이 됐었고, 그 이전엔 대장동 재판에서 이른바 '정영학 녹취록' 음질이 논란이 됐었죠.
고(故)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 연방대법관은 생전 인터뷰에서 무의식적인 편견(unconscious bias)에 대해 타파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오케스트라에서 단원을 뽑을 때 성 차별이 없도록 커텐 뒤에서 연주하는 방식을 도입했지만, 심사위원이 연주자의 신발을 보고 성별을 구별할 수 있었다는 사례를 예로 들면서요.
피고인 이정훈씨는 이미 국보법 위반으로 옥살이를 했던 사람입니다. 북한 공작원으로 생각되는 사람과 접선도 했습니다. 이밖에도 이씨가 '간첩인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증거는 더 있습니다. 다만 재판부가 이날 봉인해제된 접선 영상에서 이씨가 무슨 말을 했는지 결론 내릴 때만큼은 '연주자의 신발' 같은 선입견은 완전히 배제하고 오직 영상 속 소리만으로 증거 능력을 판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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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박희원 기자 wontime@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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