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을 때 성적 쾌감”...내연녀에 때려달라 애걸복걸한 소설가의 사생활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3. 10. 22.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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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44] 문학사에서 길이 남을 소설가 하면 내로라하는 대문호의 이름이 몇 떠오릅니다. 사실주의 소설의 대가인 톨스토이나, 영문학의 아버지 셰익스피어, 미국 문학의 시대를 연 마크 트웨인도 생각납니다. 근대 문학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인간 실존적 불안과 부조리를 묘사한 프란츠 카프카도 빼 놓지 않으시겠지요.

저에겐 또 다른 맥락에서 생각나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19세기 오스트리아 소설가 레오폴트 폰 자허 마조흐입니다. 이름이 생경하시다고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문호의 이름이 문학사보다는 정신분석학에 그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채찍질은 인류의 가장 큰 형벌이었다. 이 과정에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마조히즘도 등장했다. 그림은 윌리엄 부게로의 ‘채찍을 맞는 예수 그리스도’(1880).
그렇습니다. 육체적 고통 속에서 쾌락을 느끼는 피학적 성향을 뜻하는 ‘마조히즘’은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가 그에게 불멸의 명성을 선사했지요.

오랜 세월 자허 마조흐란 이름은 언제나 성적으로만 주목받아 왔습니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뒤편에 숨어야만 했습니다. 그의 텍스트가 다시금 평가받기 시작했던 건 1968년. 프랑스의 유명 철학자 들뢰즈가 그의 작품을 분석한 ‘마조히즘:냉정함과 잔인함’을 출간하면서였습니다.

그는 자허 마조흐의 작품을 이렇게 평가하지요. “마조히즘은 단순히 고통을 즐기는 것보다 훨씬 더 미묘하고, 복잡한 것”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마조흐는 복잡다단한 인물입니다. 마조히즘의 이름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사색하려는 배경입니다.

젊은 시절의 자허 마조흐.
의외로(?) 보수적 집안에서 태어난 자허 마조흐
자허 마조흐는 1836년 오스트리아 렘베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소설가라면 으레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 자랐을 거라 생각하시겠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제국 경찰청장,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의 귀족 여성이었습니다. 집안 종교는 독실한 가톨릭. 신분과 종교의 조합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그는 보수적 가풍 속에서 자라납니다. ‘자유’라든가, ‘개성’이라는 것과는 영 거리가 멀었지요.

좋은 가문의 반듯한 아들로서의 가면을 벗어던진 건 그가 대학에 입학한 1854년부터였습니다. 오스트리아 두 번째로 큰 도시 그라츠에서 법학·수학·역사를 공부했지요. 그가 가장 좋아하던 과목은 역시 역사였습니다. 마조흐는 이때부터 역사를 배경으로 한 단편소설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지요.

자허 마조흐는 우크라이나 출신 어머니로부터 민속 신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이는 그의 소설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사진은 우크라이나 신화 속 장면을 그린 삽화.
역사 속 인물의 숨겨진 이야기를 다루면서 그는 자신만의 개성을 쌓아갑니다. 그라츠에서 만난 예술가와 교류하면서 자유로운 생각들을 시나브로 쌓아갔지요. 오스트리아 민속과 문화를 잘 녹여낸 덕분에 평가도 좋았습니다. 그는 곧 문학이라는 자유에 빠져들었지요.

특히 그는 오스트리아 갈리시아 지방 민중의 삶을 소설 속에 잘 녹여내 당대 소설가로부터 호평받았지요. 그 유명한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헨릭 입센이 자허 마조흐의 작품을 높게 평가한 인물들입니다.

문제적 소설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탄생
1870년은 자허 마조흐에게 있어 기념비적인 해입니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를 출간해서입니다. 이 이야기의 줄거리를 잠깐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세베린이라는 남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완다라는 여성을 보고 첫눈에 반하지요. 하지만 그 방식이 괴이쩍었습니다. 그녀에게 다가가 “당신의 노예가 되고 싶소”라고 말하는 것이었지요. 그러고는 점점 더 가학적인 행위를 요구합니다. 알몸에 모피를 입은 채로 자신을 채찍질해달라는 해괴한 부탁이었습니다.

1555년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가 그린 거울 속의 비너스. 모피를 입고 있는 누드는 마조흐 소설의 모티브가 됐다.
때론 흑인 여노예를 시켜 세베린을 기둥에 묶게 한 후 채찍질을 하곤 하지요. 세베린은 그녀에게 가혹행위를 당할수록 그녀를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물론 완다의 마음은 다르게 흘러가지요. 세베린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조를 잃은 아름다운 여인과 폭정 그리고 잔인함, 이 세 가지만큼 내 욕망을 자극하는 건 없다.”

그의 소설은 꽤 인기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고통과 복종을 미학적으로 승화한 데 대한 대중의 반응은 뜨거웠지요. 불과 100년 전 사드의 작품이 처음 등장했을 때와는 달랐습니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 1902년 삽화.
하지만 당대 모든 이들이 그의 작품을 알게 된 건 한 의사 덕분이었지요.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 리차드 본 크래프트 에빙이었습니다. 1886년 그가 성적 병리학을 정리한 책 ‘사이코패시아 섹슈얼리스’였습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성도착증을 설명하고자 시도한 책이었지요. 이 책에서 가학성애와 피학성애를 설명하면서 ‘사디즘’, ‘마조히즘’이 최초로 등장하지요. 에빙은 ‘마조히즘’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특정 인간에게 무조건 복종하면서 느끼는 성적 감정”. 자허 마조흐의 작품은 이제 ‘마조히즘’이란 용어에 잠식되는 처지에 놓이지요. 그는 자신의 소설 작품이 이런 식으로 소비되는 것에는 불쾌함을 느꼈습니다.

‘마조히즘이란 용어를 만든 본 크래프트 에빙.
소설이 아니라 자서전이었어?
소설이 소설이 아니었습니다. 자허 마조흐 본인 자체도 고통에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의 소설대로 피학성애를 느끼는 것이었지요. ‘모피를 입은 비너스’ 역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었습니다.

파니 피스토어라는 귀족 출신 과부와 연애할 때 실제로 서약서를 교환하고 노예 생활을 하기도 했었지요. 파니가 잔인하게 그를 대할 때 쾌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자허 마조흐는 자신의 이름을 하인들이 많이 쓰는 ‘그레고어’로 쓰고 하인처럼 굴었습니다.

“이 채찍으로 나를 때려줄 수 있어요?” 미망인 파니 피스토어와 주종 관계를 맺은 자허 마조흐는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두 사람의 사진.
피학성애는 연애가 끝난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자신과 결혼한 아내 오로라에게 채찍으로 때려달라고 애원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자허 마조흐 본인이 사냥감이 될 테니, 보피를 입고 사냥꾼처럼 자신을 쫓아오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피학성애가 너무 심한 나머지 어느 날은 딸 샤샤 앞에서 자신을 때려달라고 부탁까지 하게 되지요.

오로라는 더 이상 남편을 견디지 못하고 그와 이혼을 결심합니다. 자허 마조흐가 신문광고에 자신의 아내와 성관계를 할 힘센 남자를 구해보자고 요청한 뒤였습니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는 자허 마조흐의 삶과 가치관이 그대로 투영된 셈이었습니다.

자허 마조흐의 부인 ‘오로라’는 남편의 피학성애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이혼했다.
단순한 변태는 아니었던 자허 마조흐
그러나 그를 단순히 ‘변태적 인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자유주의적이면서 동시에 약자에 대한 감수성도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자허 마조흐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유대인에 대한 공감을 듬뿍 드러냅니다.

19세기 중반부터 점점 독버섯처럼 퍼진 ‘반유대주의’에도 공개적으로 맞서 싸웠었지요. 어렸을 적 살았던 갈리시아 지방에서 영주에 대한 농민반란을 본 뒤로 그는 언제나 약자를 향해 연민의 시선을 보냈습니다. “비참한 수레에, 빨간 피가 흘렀고, 그 피를 개가 핥았다.”

가난을 못 이기고 봉기한 농민의 처참한 결말을 본인의 책 속에서도 여럿 남겼지요. 군국주의로 치닫는 비스마르크 체제의 독일을 비판한 것도 그였습니다.

1889년 프랑스 파리에 걸린 한 선거 포스터.유대인은 우리 민족의 적이라는 공공연한 반유대주의를 설파하고 있다. 당시 유럽에서 반유대주의가 얼마나 뿌리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그림.
그의 소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변태적 작품으로 독해하기엔 아까운 부분이 많습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높은 여성 평등 의식 때문이지요. 마조히즘은 여성을 지배하는 남성이라는 기존의 가치관을 뒤집습니다. 남성 스스로 강한 여성에 예속되기를 원하는 피학적 성향을 일컫지요. 남녀의 성 관념을 전복시키는 역할을 하는 셈. 작품 속 여성 해방의 메시지가 깃들어 있는 것이지요.

소설 속 대사를 옮겨 적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적이나, 노예, 혹은 폭군만이 될 수 있다. 결코 동반자는 될 수 없다. 여자가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가질 때에만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저명한 프랑스 작가 장 뒤 튀르가 “사랑에 관한 가장 위대한 책”이라고 평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마조히즘은 여성 상위의 권력관계를 상상하는 매개가 되기도 했다. 1890년대 마조히즘 이미지.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철학자 들뢰즈, 평론가 롤랑 자카르 같은 이들은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여성을 끊임없이 악마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혐오’적 작품이라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재평가를 받기 시작한 자허 마조흐
1968년 철학자 들뢰즈는 ‘마조히즘’을 분석한 책을 출간하며 한발 더 나아갑니다. 마조히즘을 단순히 맞을 때 쾌감을 느끼는 피학성애라는 단순한 해석을 거부하지요. 오히려 쾌락은 맞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의 긴장 속에 놓여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맞기 직전까지의 과정에서 오는 불안이 쾌락의 근원이라는 해석이지요.

실제로 자허 마조흐의 작품 속에는 채찍을 때리는 장면보다, 내리치기 직전의 장면이나, 모피를 벗는 장면을 정지된 사진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허 마조흐만의 독창적인 미학이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노년의 자허 마조흐. 정신병을 앓으면서 그의 말년은 좋지 않았다.
그의 말년은 결코 행복하진 않았습니다. 끊임없는 쾌락을 추구하다 50대 초반에 정신병을 앓게 되면서입니다. 1895년 린드하임에서 사망합니다. 사망하기 두 해 전까지도 반유대주의에 저항하는 단체를 설립하기도 했던 그였습니다.
1994년 영화 ‘모피를 입은 비너스’ 한 장면. <사진 출처=IMDB>
오늘날 그의 텍스트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미술계에서도 ‘마조히즘’은 하나의 주요 키워드이지요. 1960년대 크리스 버든, 비토 아콘치는 피학적 신체미술을 선보여 마조히즘적 미술(Masochistic Art)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가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이유 역시 그가 복잡다단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 도덕과 방탕을 동시에 지닌 우리처럼요.

우크라이나 서부 렘브레그에 마련된 자허 마조흐의 동상. 그가 태어날 당시 이 땅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였다.
<네줄 요약>

ㅇ맞으면서 성적 쾌락을 느끼는 ‘마조히즘’은 오스트리아 소설가 자허 마조흐의 이름에서 따왔다.

ㅇ그의 소설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서 피학성애를 묘사했기 때문이다.

ㅇ마조흐는 또한 평생을 반유대주의에 맞서 싸워 온 복잡한 인물이기도 하다.

ㅇ야한 글 쓰는 사람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닌가 봅니다.(제 얘기는 아닙니다.)

<참고 문헌>

ㅇ윤시향, 자인한 쾌락-자허 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 2003년

ㅇ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모피를 입은 비너스,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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