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직'에 연연하는 양반들의 불편한 공통점
진급 신경쓰지 않은 이순신
안골포 내려가 군사회의 열고
유인 대신 전면 공격으로 승부
왜선 42척 중 20여척 침몰시켜
직職에 연연하지 않는 이는 직을 받든 그렇지 않든 '제 일'을 해낸다. 반면 직에 연연하는 사람들은 통상 '제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책임'을 지지도 않는다. '직'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명하신 분들은 지금 어떤가. 직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가 그 반대가 많은가.
류성룡은 이순신이란 사람이 작위의 진급 여부에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조선의 미래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인지라 이순신의 작위를 고민할 겨를이 류성룡에겐 없었다. 그는 「징비록」에 한산도 싸움을 이렇게 기록했다.
"적은 본래 수군과 육군이 합세해 서쪽으로 가려 했지만 이 한번의 전투로 적의 한팔이 끊어졌다. 소서행장이 비록 평양을 얻었으나 그 세력이 고립돼 감히 나아가지 못했다. 국가가 호남과 호서를 보전하니 이로써 황해도와 평안도 연해 일대까지 지켰고, 군량 조달길이 열리고 호령이 통해 나라를 회복할 수 있는 기반이 쌓였다. 요동, 산해관, 천진 등지가 침범을 당하지 않아 명나라가 군사를 조선으로 출병할 가능성이 생긴 것도 이 전투의 공이다. 오호라, 어찌 큰 업적이 아니겠는가."
선조도 '정1품 하사'를 철회한 게 아쉬웠는지 특별히 교유서를 내려 이순신의 공을 독려해줬다. 선조의 교유서 내용은 이랬다.
세상에 다시없는 인재에게는 세상에 다시없는 대우를 줘야 하고… 비상한 보답은 비상한 공을 대접함이니… 이에 따라 표창하는 전거를 들어 뛰어난 노고를 갚고자 한다. 돌아보건대 나는 모자란 자질로 왕위를 지켜왔다. 25년 동안의 소의간식宵衣肝食(날이 새기 전에 일어나 옷을 입고 늦게야 밥을 먹음. 임금이 정사에 부지런하고 걱정이 많음을 뜻함)에 계책을 굳건하게 세웠지만 200년 동안의 문념무희文恬武嬉(문관들은 안일하게 지내고 무관들은 희롱한다는 뜻으로, 안일에 빠져 제 직분을 다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에 백성은 전투에 익숙하지 못했다.
섬나라의 분수 모름을 어찌 알았으랴. 국경의 무방비를 틈타서 해를 향해 활을 당기고 요임금을 보고 짖는구나. 호흡하니 삼도가 무너지고 유린하니 팔도가 기울었다. 성곽과 산수를 잃었으니 어디에 금성탕지金城湯池(쇠로 만든 성과, 그 둘레에 파 놓은 뜨거운 물로 가득 찬 못이라는 뜻. 방어시설을 잘 갖춘 성을 이르는 말)가 있겠으며 무기와 곡식을 버렸으니 도리어 적을 도운 셈이다.
생각하건대 지금 깨끗한 한 조각 땅이라곤 단지 호남의 바다 한 지역만이 남았는데… 6만 기병이 경기에서 무너졌으니 이광이 적을 가벼이 여겨 패함이 원통하고 2000병사가 금산에서 함몰했으니 고경명이 위기에 처해 목숨을 바침이 애석하다.
오직 이순신 경만이, 계책을 가슴에 품어 온몸을 쓸개로 삼고, 충의를 뼛속에 채워 나라를 집처럼 걱정했다. 바야흐로 맹렬한 불꽃 속에 적함을 던져 넣으니 당항포에 쌓인 시체는 강물을 흐렸고, 거센 파도 위에서 적들을 죽이니 한산도의 비린 피는 바다에 넘쳐났다.
왕의 위엄을 변방에까지 떨치고 흉한 넋을 주위에서 빼앗았다. 뭇 장수들은 팔짱만 끼고 있다가 갑옷을 버리고 무기를 끌고 도망가기를 다퉜고, 여러 고을은 소문만 듣고서는 단지 문을 열어 적을 들여보낼 줄만 알았다. 생각해보건대 경의 용맹이 아니었다면 그 누가 국가와 더불어 존망을 함께하리오. 경에게 정헌대부를 제수하노라. 내가 경에게 기대함이 더욱 깊다.
고성 견내량에서 밤을 지낸 이순신은 이튿날인 7월 9일 왜적 함대 40여척이 숨어 들어가 있는 안골포로 향했다. 이날은 해상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 함대의 이동이 쉽지 않았지만 견내량에서 10리(약 25㎞)를 이동해 거제의 온천도溫川島(일명 칠천도漆川島)에 도착, 이억기와 원균 이하 제장을 불러 군사회의를 열고 적선을 공격할 계책을 의논하고 밤을 보냈다.
작전 내용은 이랬다. "이순신과 원균의 함대는 전면 공격에 나선다. 이억기 함대는 가덕도 근처에 매복해 혹시 있을지 모르는 왜적의 후방 공격을 대비하다 안골포에서 접전이 벌어지면 협공에 나선다."
7월 10일 새벽 2시께 온천도를 출발한 조선 연합함대가 새벽 5시 안골포에 도착하니 구귀가륭이 이끄는 왜적 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 등 42척이 정박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적은 육지에 화포를 장착해놓고 함대를 엄호하는 등 만만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이순신은 선례를 남길 만한 신박하고 전략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다. 안골포는 폭이 좁고 수심이 얕은 포구로 방파제까지 있었다. 썰물 때는 갯벌이 드러난다. 밀물이 올라오는 만조 시간은 오전 6시와 오후 6시. 따라서 공격하기 알맞은 시간대는 새벽 5시부터 7시와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각각 2시간 동안이다.
일단 판옥선과 거북선으로 구성한 몇척의 선발대를 방파제 안으로 진격시켜 적의 화포 사정거리 밖에 멈추게 했다. 여기서 함선을 90도 돌려 옆구리에 장착한 함포들을 사정없이 발사했다. 왜적의 화포보다 사정거리가 긴 점을 유감없이 활용했다. 사격이 끝난 선발대가 빠져나오면 다른 함선들이 대신 들어가 다시 함포를 쏘아댔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대도 합세해 쉬지 않고 교대로 주력 화포인 천자총통의 대장군전이 적의 배에 꽂았다. 왜적 함선들은 배 바닥까지 구멍이 났다. 화포와 불화살을 맞아 즉사하는 왜적들이 속출했다.
이른 아침의 만조가 끝날 때쯤, 신나게 공격하던 조선 연합함대가 물러나자 시간을 벌어들인 왜적들은 함선을 수리하고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오후의 만조기가 되자 조선 연합수군은 똑같은 방법으로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이순신은 이같은 두차례의 공격으로 왜선 42척 가운데 20여척을 침몰시켰고 3960명의 왜적 수군을 제거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Copyright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