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장…김영도 전 의원 별세

이충원 2023. 10. 21.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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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25일 '마지막 강의'를 하는 고인 [촬영 이충원]

(서울=연합뉴스) 이충원 기자 = "나는 대청봉도 못 오른 채 에베레스트, 그린란드부터 갔다. 남은 한이 있다면 설악산 폭풍설 속에서 혼자 슬리핑백을 뒤집어쓰고 비박(bivouac·노숙)을 하고 싶었는데, 그걸 못했다는 것이다."(2022년 10월25일 '마지막 강의'에서)

1977년 고 고상돈(1948∼1979) 대원 등을 이끌고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산(8,848m) 등정에 성공한 김영도(金永棹) 전 의원이 21일 오후 5시께 경기도 의정부 자택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아시아산악연맹(회장 이인정)이 전했다. 향년 99세.

1924년 10월18일 평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평양고보,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중학생 때 일본의 오시마 료키치가 쓴 '산-연구와 수상'(1930, 이와나미서점)이라는 책을 접한 뒤 취미로 영어·일본어·독일어로 적힌 등산 서적을 읽었다. 6·25 전쟁 중 학도지원병으로 입대해 통역장교로 복무했다. 1956∼1963년 성동고 교사로 일한 뒤 1963년 민주공화당에 참여, 정치에 입문했다. 본인은 "별로 하기 싫었는데 윤달용의 추천으로 공화당에 들어가게 됐다"고 말한 적이 있다. 1967∼1971년 당 선전부장, 1971∼1973년 당 사무차장을 지낸 뒤 1973∼1979년 제9대 국회에서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당 선전부장 겸 산악회장이던 1970년 정부자금 7천만원으로 전국 주요 명산에 인수산장, 권금성산장, 노고단사장 등 산장과 대피소 35개를 건립하는 사업을 벌였다. 1971년 히말라야 로체샤르 원정(대장 박철암) 비용을 지원해준 것을 계기로 1971∼1976년 대한산악연맹 부회장, 1976년 10월∼1980년 12월 제7대 회장을 역임했다.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 왼쪽 위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고인, 박상열 부대장, 고 고상돈 대원, 셰르파 사디앙 푸르바씨, 한상수 대원. [연합뉴스 자료사진]

고인은 대한산악연맹 회장이던 1977년 9월15일 한국 등반대(18명)를 이끌고 세계 8번째(국가 기준)로 에베레스트산 등정에 성공했다. 1977년은 한국이 처음으로 수출 100억불을 달성한 해였다.

1973년 12월 네팔 당국으로부터 '1977년 가을/몬순기(9∼11월)에 입산'해도 된다는 허가서를 받고 대한산악연맹을 중심으로 '77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꾸려 훈련에 들어갔지만 문제는 경비였다. 고심 끝에 찾아간 한국일보의 장기영(1916∼1977) 사장 주도로 대우실업, 대한항공 등 11개 기업의 지원을 받아냈다.

1977년 6월11일 발대식에 이어 6월16일 선발대, 7월2일 본대가 네팔로 향했다. 1차 공격조로 지명된 박상열 부대장과 셰르파 사디앙 푸르바는 설벽인 힐러리 스텝(8,790m) 앞에서 산소가 떨어지는 문제에 직면, 등정에 실패했다. 원정대의 일원이었던 조대행 전 대한산악연맹 부회장은 '산악인 구술조사 보고서Ⅳ'(2019)에서 고인이 그날 밤 "상열이 죽으면 어떡하나"라며 울고 있었다고 전했다.

고인이 2차 공격조로 지목한 것이 고상돈 대원과 셰르파 펨바 노르부였다. 이들이 9월15일 낮 12시50분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으면서 산악인으로는 세계 55번째, 국가로는 8번째로 세계 최고봉 등정에 성공했다. 원정대의 일원이었던 이태영 전 한국일보 기자는 후일 "국산 장비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며 "일본에 가서 사기도 했고, 현장에서 다른 산악 원정대가 남겨 놓은 산소통을 주워 쓰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김영도 에베레스트 원정대장(1977.10.10) 국회 본회의 대정부질의에 앞서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고 귀국한 김영도 의원을 기립박수로 환영하고 있다. [자료사진]

10월6일 귀국 후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고, 1977년 10월10일 국회 본회의에서 당시 야당(신민당) 소속이던 김수한 의원이 의사진행 발언을 통해 "우리 민족의 강인한 의지력과 불굴의 기혼(氣魂)을 세계에 과시한 김영도 에베레스트 원정대장에게 국민의 이름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내자"고 말해 의원들의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다.

1978년에는 그린란드 탐험에 나서 북위 80도2분7초(북극은 북위 66도33분)까지 진출했다. 한국인 최초(동양 2번째, 세계 8번째)의 북극권 원정이었다. 1981년 2월 마포에 한국등산연구소를 설립하고 등산 관련 서적을 출판했다.

2012년 대전 강연에서 "나는 사람을 구분할 때 산에 가는 사람과 산에 가지 않는 사람, 산에 가는 사람으로서 책을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으로서 글도 쓰는 사람과 쓰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한다"고 했을 만큼 독서와 글쓰기에서 등산의 진정성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저서 '나의 에베레스트'(1980), '우리는 산에 오르고 있는가'(1990), '산의 사상'(1995), '에베레스트 '77 우리가 오른 이야기'(1997), '우리는 왜 산에 오르는가'(2005), '서재의 등산가'(2020) 등을 남겼고, '죽음의 지대'(1985), '검은 고독 흰 고독'(1987), '제7급'(1989), '죽음의 지대'(1994), '하늘에서 추락하다'(2018) 등 라인홀트 메스너의 책을 여러권 번역했다.

고인과 '77 에베레스트 원정대원 고인과 조대행 박사(왼쪽에서 두번째) 등 당시 원정대원들이 2022년 10월25일 오후 서울 시민청 태평홀에서 한국등산연구소가 주최한 고인의 '마지막 강의' 직후에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촬영 이충원]

대한산악연맹이 창립 50주년을 맞아 2012년에 선정한 '대한산악연맹을 빛낸 50인'에 포함됐고, 별세 하루 전인 20일 울주국제산악영화제에서 특별공로상을 받았다. 아들이 대리 수상했다.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명예교장은 저서 '그곳에 산이 있었다'(2014)에서 "김영도 회장은 젊은 산악인들에게 롤 모델 같은 사람"이라며 "수많은 산서를 펴낸 저술가요, 산서를 통해서 등산의 본질을 설파해 온 알피니즘의 전도사요, 한국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을 성사시킨 인물이면서도 상대를 인정하고 시시비비를 공정하게 가려내는 넉넉한 인성의 소유자였기 때문"라고 적었다.

2022년 10월25일 서울시청 태평홀에서 열린 '마지막 강의'에서 "세상에 인간이 한번도 못 오른 '미답봉'은 남아있지 않지만 라인홀트 메스너는 '내가 못 오른 산이 미답봉'이라고 했다. 여러분의 마음속엔 여전히 '공백'이 남아있는 것이다"라며 "우리, 알피니스트는 고고하고 준엄한 대자연(을 즐길 수 있는)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유족은 1남2녀.

chungw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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