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만차 뙤약볕 견뎌낸 ‘돈키호테의 와인’…제 갈 길만 지키는 뚝심이란 [전형민의 와인프릭]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한복판에 위치한 에스파냐 광장(Plaza de Espana)에는 서울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처럼 소설 돈키호테(Don Quijote)를 창작한 세르반테스의 기념비가 우뚝 솟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돈 키호테와 산초의 청동상이 있죠.
돈키호테, 어렸을 때 한번쯤 읽어봤을 어린이 필독 도서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인 돈키호테가 고향인 라 만차(La Mancha)를 떠나 스페인을 주유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에피소드를 엮어 놓았습니다.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다양한 모순을 풍자하는 방식이죠.
소설에 등장하는 라 만차는 하나의 도시가 아닙니다. 현재로 따지면 마드리드 남부부터 안달루시아 북쪽까지의 드넓은 고원 평야 지대인데요. 극도로 메마르고 건조한 기후, 따사롭다못해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 해가 지면 뚝 떨어지는 기온 등 척박하기 그지 없는 땅입니다.
포도나무가 극한의 척박한 환경에서도 자라나는 몇 안 되는 작물이라는 점 기억하시나요? 아주 오래 전부터 라 만차에서도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한때 라 만차가 전 유럽의 와인 생산기지 역할을 하기도 했죠. 오늘은 돈키호테의 고장, 라 만차의 와인의 역사와 현재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어떤 와인이든 냄새만 한 번이면, 족보가 어떻게 되는지, 맛은 어떻고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술통을 몇 번이나 바꿨는지, 술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지 알아맞히거든요. 하지만 놀랄 건 없어요. 내 핏줄에 우리 아버지 쪽으로 오랜 세월 동안 라 만차에서 알려진 아주 대단한 와인 감정사가 둘이나 있었으니 말이죠.”
소설 속 돈키호테 시대인 17세기 당시 라 만차의 와인 산업이 나름대로 유명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라 만차 포도원의 기록은 레콩키스타 시대(718년~1492년) 후기, 이 지역에 사람이 다시 거주하기 시작한 12~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일부에서는 라 만차 포도원의 역사가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라 만차가 포도 나무 재배에 이렇게 유구한 역사를 지닌 것은 이 지역의 독특한 기후적 특성에서 기인한다는 게 정설입니다. 너무 가혹한 특징적인 기후 때문에 키울 수 있는 게 포도 밖에 없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산이나 계곡 같은 지형지물이 없는 평야 지대라는 점이 추가됩니다. 고도가 높다보니 햇볕이 내리쬐는 강도가 남다르고, 그 햇볕을 피할 곳조차 없는 셈입니다. 여름 기온은 45도까지 치솟기도 합니다. 고저차로 만들어지는 수증기의 응축도 기대하기 어렵다보니, 연간 강우량 역시 300~400㎜ 정도로 매우 적습니다. 사막화가 진행되는 것(연간 250㎜ 이하)만 겨우 면한 수준이죠. 참고로 우리나라는 연간 1200㎜ 정도 입니다.
이 때문에 포도나무도 최대한 땅에 붙여서 키웁니다. 햇빛을 조금이라도 피하고 나무에 조금이라도 찬 기운을 주기 위해서죠. 또한 포도 열매가 무성한 잎사귀들 아래 그늘에서 안전하게 자랄 수 있도록 일부러 쑥대머리처럼 나뭇잎이 마구 자라나도록 가지치기를 합니다. 이를 부쉬 트레이닝(Bush Training) 또는 고블렛(Goblret·고블렛잔 모양으로 가지치기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19세기 유럽 와인 업계는 진딧물의 일종인 해충 필록세라 때문에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습니다. (와인프릭 <필록세라편> 참고)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오로지 신대륙 포도 품종의 뿌리를 접붙이기하는 것 뿐이었죠. 그런데 필록세라가 창궐해 전 유럽을 휩쓸던 시기, 라 만차의 농부들은 필록세라를 ‘소 닭 보듯’ 했습니다. 필록세라가 유독 라 만차 만은 신기하리만치 피해갔거든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너무 건조하고, 너무 덥고, 너무 추운 라만차의 기후 덕분에 ‘포도나무계의 흑사병’이라 불리던 필록세라조차 이 지역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 겁니다. 유난히도 가혹했던 환경조건이 전화위복이 되는 순간 입니다.
유럽인들에게 와인은 한국인들에게 소주 아닐까요. 전 유럽의 와인 생산량이 필록세라 창궐로 바닥을 찍고 와인이 금처럼 귀해진 시기, 그저그런 와인이었던 라 만차의 와인들이 유일한 대안으로 날개 돋힌듯 팔려 나가게 됩니다. 이때가 라 만차 와인의 전성기였습니다.
더 큰 문제는 라 만차 와인에 덧씌워진 이미지 였습니다. 벌크 와인=질 낮은 와인=라 만차 와인 이라는 공식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습니다. 사실은 벌크 와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질이 낮은 것도 아니고, 라 만차에서만 벌크 와인이 생산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벌크 와인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라 만차 와인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왠만한 와인 애호가들도 ‘라 만차 와인’이라고 하면 일단 “맛있는 와인 놔두고 굳이 왜 벌크 와인을 마시냐”고 핀잔하기 일쑤인데요. 라 만차 와인은 이렇게 영영 질 낮은 와인이라는 딱지를 떼지 못하는걸까요?
가장 대표적인 게 라 만차 지역을 △D.O.라 만차와 △카스티야 라 만차로 분리한 것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고급 와인은 지리적 원산지 표기를 쓰는 D.O. 라 만차 와인으로 출시하고, 벌크 와인이나 테이블 와인은 카스티야 라 만차로 출시하는 식 입니다. 홍보가 더 필요하지만,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조금씩 D.O.라 만차와 카스티야 라 만차를 구분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호재입니다.
아울러 라 만차가 젊은 연령대를 겨냥해 쉽게 마실 수 있는 와인(Easy drinkable) 전략을 구사하는 점도 주목할만 합니다.
이는 세계적인 추세와 관련이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우리나라의 와인 시장 볼륨이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세계 시장에서 와인의 인기는 감소세입니다. 특히 젊은층에서는 복잡하고 어려운 와인보다는 맥주, 위스키, 하이볼, 칵테일 등 보다 직관적이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음료를 선호하는 경향이 커지는 분위기죠.
이런 추세를 알고도 와인 업계는 선뜻 따라가기를 꺼리고 있습니다. 와인의 전통적인 매력이자 고급과 저급을 구분하는 중요 척도 중 하나가 섬세함과 복합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벌크 와인으로 찍혀버린(?) 라 만차 와인은 발상의 전환으로 좀 더 직관적이고 편한 와인을 시장에 내놓는 참신한 시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돈키호테를 이토록 위대한 소설이라고 칭하는 것일까요. 소설은 우리가 인간이기를 잊을 때, 혹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제 모습을 잊을 때,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곳곳에 품고 있습니다. 아울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세상과 싸우고 타협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게 당당하고 아름다운 인생인지를 넌지시 일러주기도 합니다.
어쩌면 돈키호테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남들과 비교해 앞서나거나 시류를 따르는 와인을 만들기보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 자신 만의 색깔을 묵묵히 만들어가는 라 만차 와인에 정말 잘 어울리는 소설 아닐까요. 소설 속 돈키호테의 한 마디가 매일 경쟁에 내몰리는 구독자님들의 가슴에 한 줄기 위안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종류의 비교든 비교라는 것은 모두 증오스러운 것임을 이미 아시지 않소. 그런데 무엇 때문에 누구를 누구와 그토록 비교하는 지 모르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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