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대서 강간하는 의사를 봤습니다”…일본 731부대 체험한 천재소설가 [나쁜 책]
미국 소설가 가운데 가장 총명하다고 평가받는 작가가 있습니다. 1976년생으로 하버드대 문학부 졸업, 마이크로소프트(MS) 프로그래머, 하버드대 로스쿨 출신 변호사 등 스펙을 가진 켄 리우입니다.
그의 소설 집필 방식은 독특합니다. 주로 그는 역사적 팩트에 과학적 상상을 덧댑니다. 세계 유명 문학상을 전부 휩쓴 젊은 거장인 그의 작품 수십 편 중 유독 일본 출간만 거절당한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 731부대를 소재 삼은 소설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The Man Who Ended History)’입니다. 역사학·법학·컴퓨터공학을 엮은 천재적 작품인데, 일본 금서인 셈이지요.
1940년 중국 하얼빈시 버려진 공장에서 자행된 731부대 생체 실험과, 이후의 논쟁을 ‘가상으로’ 다룬 소설입니다. 이런 천재적인 소설을, 저는 개인적으로 처음 봤습니다. 켄의 소설로 여행을 떠나봅니다.
공기 속에 뒤섞인 저 입자는,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입자를 ‘빛의 속도’로 관측하면 (역시 소설적 가정입니다) 과거의 한때가 시각, 소리, 냄새, 초음파 등 정보로 데이터화됐습니다.
인류사 미래를 뒤엎을 위대한 발견이었습니다. 주인공 기리노 박사는 ‘뵘기리노 입자 관측 장치’까지 개발합니다.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과거를 관찰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모두가 열광한 가운데, 공교롭게도 주인공 기리노 박사는, 첫 번째 ‘시간 여행’ 장소로 1940년 중국 하얼빈시(市) 외곽의 한 남루한 공장을 선택합니다. 일본 제국 731부대 실험실 현장이었습니다.
릴리언은 1940년 731부대 피해자 여성의 조카였습니다. 그녀는 ‘고모의 최후’가 궁금해 실험자로 자원했고, 높은 경쟁률을 뚫고 ‘시간 여행’을 떠납니다.
실험 시작 후 릴리언이 눈 떠보니, 영하 20도 추위 속 공터였습니다. 얇은 옷의 포로가 한 줄로 길게 서 있었습니다. 731부대가 ‘극단적 저온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 중이었습니다.
릴리언은 육체가 없으면서도, 소리를 듣고 눈으로 보며 현장을 감각합니다. 731부대 장교가 포로의 팔을 때리자, 사람 몸에서 이런 소리가 났습니다. ‘깡, 깡, 깡….’ 팔 안의 혈액까지 고체로 바뀐 뒤였습니다.
결국 미국 하원 청문회 현장에 증인으로 불려간 릴리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 “…인체 일부를 보존해 둔 유리 항아리가 많이 보였습니다. 사람 몸의 절반이 들어 있는 기다란 유리 항아리를 본 기억도 납니다. 세로로 이등분된 몸뚱이가 항아리 속에 둥둥 떠 있었습니다….”(506쪽)
◎ “…비명 소리가 들려서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한 의사가 수술대에 누워 있는 여성을 강간하는 중이었습니다. 여성이 몇 명 더 있었는데 모두 나체였고, 수술대에 누운 여성의 팔다리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강간에 집중할 수 있게 말입니다….”(507쪽)
◎ “…감방에 혼자 있는 고모를 발견했습니다. 손바닥에 발진이 나 있었고 목둘레는 림프샘이 부어서 울퉁불퉁했습니다. 고모의 불룩한 배를 보고 임신까지 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509쪽)
상황이 악화되자, 미국과 중국 정부는 뵘기리노 입자를 활용한 ‘시간 여행’ 장치를 폐쇄시킵니다. 또 (주로 가해국이라고 여겨지는) 세계 각국 정부는 ‘시간 여행 전면 중지 상호 협약’을 맺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의도의 정반대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지요.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티베트인, 아메리카 원주민, 인도인, 케냐의 키쿠유족, 신대륙 노예의 후손들, 세계 곳곳 희생자 집단들이 너도나도 “기리노 박사의 관측 장비를 사용하게 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이 기계를 손에 쥐는 자가 역사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어떤 파국을 맞이하게 될까요.
그러나 켄 리우의 이 소설은 지루함과 따분함을 넘어섭니다. 두 가지의 강력한 힘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첫째, 이 소설은 ‘역사의 점유’란 주제를 신선한 방식으로 사유합니다.
수천 년 세계사에서, 전쟁은 대부분 ‘영토 분쟁’이었습니다. ‘공간의 분쟁’이 곧 세계 분쟁사와 같았지요. 현재 대립중인 국가들은, 국경을 사이에 두고 서로에게 자신의 ‘공간’을 주장하며 대치 중입니다.
가자지구(이스라엘·팔레스타인), 크림반도(러시아·우크라이나), 댜오위다오(혹은 센카쿠열도, 중국·일본) 등도 모두 공간의 싸움입니다. 또 재론의 여지조차 없는 일이지만, 대한민국 영토 독도를 둘러싼 갈등도 우리나라의 ‘공간’에 대한 일본식 투쟁입니다.
그런데 소설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은 공간 갈등을 시간 갈등으로 바꿔냈습니다. ‘시간 여행’ 주도권을 확보하면 과거를 들여다보는 일이 가능해지고, 이로써 ‘역사의 점유’도 허용되니까요.
사실 그는 중국계 미국인입니다. 그의 시선에선 일본, 중국, 미국 전부 유죄입니다. 왜 그럴까요.
책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은 일본 패망 후 ‘공산주의 계급론’에 의거하여, 일본군 포로에겐 관대했고, 간부에겐 엄혹했습니다. 하급 병사 포로들이 공산당 강의를 듣고 ‘자백서’를 쓰면 쉽게 풀어줬습니다.
그러다가 1990년대 들어서면서, 소련 등 공산권 시스템이 붕괴됩니다. 위기의식을 느낀 중국 정부는 ‘스스로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항일 전쟁의 기억을 애국주의와 일치시켰다고 이 책은 기술합니다. 항일 무장투쟁의 역사를 뒤늦게 상기시키면서, 중국 공산당의 항일투쟁 역사를 전면에 등장시킨 것이었다는 설명입니다.
또 그에게는, 미국 역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미국은 소련이 일본의 731부대 생체 실험 자료를 확보할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일본에게서 직접 731부대의 자료를 넘겨받았고, 이후 일본 제국 생체실험에 침묵했습니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맥아더 장군이었다고 소설은 기술합니다.
반일(反日) 소설만은 아니었고, 중국과 미국까지 동시에 실증적으로 비판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선 수용 불가한 작품이었지요.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은 단편소설 14편이 실린 켄 리우 책 ‘종이 동물원’의 맨끝에 수록된 작품인데, 일본 단행본 출간시 이 소설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만 빼고 출간됐습니다.
중국도 켄 리우 작품에 불쾌감을 드러냈습니다. 그의 책은 중국에서 4권 이상 출간됐는데, 간체자 중국어판에는 중국 공산당을 비판한 부분이 곳곳에 삭제된 채 출간됐다고 전해집니다. 한중일 3국 중에 이 소설을 온전히 독서 가능한 나라는 우리나라뿐입니다.
2018년 소설집 ‘종이 동물원’ 한국 출간 당시, 출판사 황금가지를 통해 연이 닿아 켄 리우를 서면으로 단독 인터뷰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켄 리우의 이메일 답변을 일부 옮겨 봅니다.
◎ “…세계는 지난날의 참상과 불의가 낳은 결과물이다. 인류의 일원으로서 우리가 물려받은 세계가 어쩌다 이런 모습이 됐는지, 모두를 포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울 의무가 있지 않을까. 우리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도록 설계된 종(種)이다. 어떤 진실은 오로지 이야기를 통해 이해할 수 있을 뿐 데이터를 통해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까다로운 진실이 담긴 이야기를 가리켜 문학이라고 한다….” (2018년 12월 18일, 서면 인터뷰)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태평양지구 환경소위원회 청문회, 아치볼드 에저리 하버드대 교수 인터뷰, 731부대 소속 의사이자 전범인 야마가타 시로의 증언, 미국 ‘이코노미스트’ 기사 등에 이어 중국 식당 종업원 쑹위운우, 오스트레일리아 퍼스 거주 교사 존, 밀워키 거주 주부 패티 애시비 등 십수 명의 이야기를 책에 담아내면서 소설이 진행집니다.
그 과정에서, “전쟁 중엔 나쁜 일이 벌어지니, 잊고 용서하는 게 크리스천의 길”이라거나 “늙은 사람들은 외로움을 많이 탄다. 일본군한테 납치당했다고 주장하는 한국인 매춘부처럼”, “중국이 티베트 사람들한테 못 되게 굴었으니, 그 업보가 아닌가”란 내용이 기술됩니다.
현실에서 많이 접했던, 낯익은 이야기들이지요.
그래서인지, 소설을 들여다볼수록, 왜 소설 제목이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 소설 역시 (혹은 이 기사 역시) 색깔론의 스펙트럼 위에서 ‘반일이냐 친일이냐, 혐중이냐 친중이냐, 친미냐 반미냐’의 기로에 서게 되겠지요. 그러나 그런 색깔론과는 무관하게, 분명한 점은, 외면하고 싶은 불의와 억압 속에서 어느 길이 옳은 길인지를 켄 리우 작가가 우리에게 질문한다는 점입니다.
※다음주에는 필립 로스 소설 ‘포트노이의 불평’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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