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대통령 심판’했던 보선, 대통령실 문책은 왜 없나
동아일보 19일 자엔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 당 4역과 오찬 뒤 용산어린이정원을 산책하는 사진이 실렸다. 햇살이 눈 부셨는지 윤 대통령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고 시커먼 양복을 입은 당 대표와 원내대표, 정책위의장, 사무총장 등이 서열대로 뒤를 따르는 맥락 없는 모습이었다. 기사 제목은 ‘윤 “저와 내각 반성하겠다…국민은 늘 무조건 옳아, 민생 챙길 것”’이었지만 분위기는 달랐다. ‘침통하다…우리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콱 막힌 울분이 압력솥 증기처럼 뿜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혹 사진을 잘못 고른 게 아닌가 싶어 대통령실 사진 자료를 찾아봤다. 아니었다. 눈 씻고 봐도 더 나은 사진이 없을 만큼 윤 대통령은 늘 그렇듯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고, 손짓을 하거나 말을 하는 대장 같은 모습이었다(식탁 앞에 다들 와이셔츠 차림으로 앉은 단 한 장의 사진 역시 대통령이 말하는 장면이다). 전임 정권 시절, 문재인 전 대통령이 참모진과 와이셔츠 바람으로 상큼발랄하게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던 사진이 조건반사적으로 떠올라 괴롭고 슬펐다. 아 이것이 ‘윤석열 대통령실’ 수준이란 말인가.
● 너무나 무능한 윤석열 대통령실
지난번 ‘도발’에서 나는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가 ‘김명수 대법원장’ 심판이라고 썼다. 윤 대통령의 김태우 특별사면은 공익제보에 대한 사법부의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김태우의 제보 덕에 문 정권 비리가 드러난 것도 사실이다. 국힘은 당초 귀책사유가 있는 강서구청장 보선에 무공천 방침이었지만 윤심에 따라 경선의 길을 열어줬고, 결국 공천했다. 나는 이런 판단이 일리 있다고 봤으나 다수 강서구민들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윤 대통령이 오만하다며 ‘정권 심판론’에 손을 들어준 거다.
보선 패배 뒤 국힘의 첫 메시지는 “강서구민과 국민들께서 보낸 따끔한 질책을 무겁게 받아들인다”였다. 그건 됐다 치고, 국민이 궁금해하는 건 대통령 반응이다. 참모진을 통해 전달된 첫 메시지는 이랬다. “정부는 어떠한 선거 결과든지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12일)
● “안 된다” 말할 수 있는 참모 있나
물론 대통령실은 계속해서 “선거 결과에서 교훈을 찾아 차분하고 지혜롭게 변화를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13일) “저와 내각이 돌이켜보고 반성하겠다”(17일)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 어떤 비판에도 변명을 해선 안 된다”(18일) “나도 어려운 국민의 민생 현장을 더 파고들겠다”(19일)는 윤 대통령의 메시지를 내놨다.
‘찔끔찔끔’ 답답하다. 그래서야 라면도 매운맛 신라면, 볶음면도 화끈한 불닭면을 좋아하는 우리 국민 성정에 맞을 리 없다. 목욕탕에서도 뜨거운 물에 들어가 “시원하다”는 국민 아닌가. 더 답답한 건 가시적 조치, 즉 비서실 문책 경질 인사가 없다는 사실이다. 윤 대통령이 김태우 사면할 때, 국힘이 윤심대로 공천할 때 “안 된다”고 직언한 참모가 없었다면 문제는 심각하기 때문이다.
또 비교하고 싶진 않지만, 文은 보선 패배 당일 최재성 정무수석과 정세균 총리의 사표를 받는 것으로 국민들에게 죄송하다는 조치를 했다고 최재성 본인이 최근 방송 인터뷰에서 말했다. 비서실장과 정책실장을 문책해야 하는데 유영민 비서실장은 임명 된 지 두 달 밖에 안 됐고 김상조 정책실장은 전셋값 폭등에 책임을 지고 보선 전에 그만뒀기 때문이다(정 총리는 사실 대선 출마를 위해 사퇴설이 계속 돌았으나 이로써 문책 경질의 모양새가 됐다). 당시 대통령 국정 수행 지지율이 32%였는데(갤럽 조사) 이렇게 ‘반응성’을 보이고도 민주당은 이듬해 정권을 잃었다.
● “말할 용기 없으면 비서실장 관둬라.”
대통령의 참모학으로 유명한 ‘럼즈펠드 법칙’ 중 첫 번째가 “대통령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날카롭게 짖어댈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미국 최연소 국방장관,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이름난 도널드 럼즈펠드(1932~2021)가 정리한 것인데 대통령에게 욕을 퍼붓는다 싶을 만큼 자유롭게 말할 용기가 없다면, 비서실장 자리를 맡지 말라고 했다.
임명 당시 “경제 전문가이면서 정무 감각을 겸비했다”고 당선인은 설명했지만 믿기 힘들다. 윤 대통령이 경제 과외를 잘 받았는지 모르겠으나 경제 성적은 올라가지 않았다. 이번 보선 패배나 대야관계를 보면 정무 감각은 꽝이다. 올 1월엔 당 중진 나경원을 향해 “대통령께서 나 전 의원의 그간 처신을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본인이 잘 알 것”이라고, 대통령 비서가 대놓고 여당 당 대표 선거에 개입하는 전무후무한 모습까지 보였다.
● 대통령 대신 ‘대통령실’ 바꾸라는 것
대통령이 대법원장에 친구의 친구를 지명했다가 야당에 비토당했다. 그러고도 헌법재판소 소장에 대통령의 서울대 법대 79학번 동기를 또 지명하는데도 비서실장으로서 “안 된다” 소리를 한 것 같지도 않다. 날카롭게 짖어댈 용기가 있었다면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라는 자가 “대학 동기, 저희도 그걸 봤는데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닌 것 같고, 대학 동기라고 해서 불이익을 받는 것도 그렇고…” 따위의 변명은 못 했을 거다. 대통령을 충심으로 보좌하는 비서실장이라면 설령 버럭 화를 좀 듣더라도 “대학 동기라면, 진정한 친구라면, 더구나 정년이 1년밖에 안 남았으면, 이번 자리는 맡지 않는 게 좋겠다” 말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 말 못 하는 비서실장이 계속 윤 대통령 곁에 있는다면, 대통령에게는 독이다.
국힘당 혁신보다 시급한 건 용산 혁신이었다. 이번 보선은 윤 대통령 심판이고, 윤 대통령을 바꿀 수 없으니 대통령실이라도 달라져야 한다는 거다. 선거에서 교훈을 ‘찾는다’고? 신문을 일별만 해도 단박에 안다. 윤 대통령이 변하라는 것이다. 민생 현장을 파고든다고? 당장 가시적 조치부터 하시라. 이건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적어도, 아니 죽어도, 비서실이 문 정권보다 못하단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나 말이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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