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별에서 왔니?’ 묻고 싶은 괴이한 모습…볼수록 끌리네 [ESC]
굵은 뿌리·몸통 한덩어리…아프리카·북남미 등 척박한 환경서 자생
뿌리 없이 수입하는 야생개체 고가…발근 뒤엔 ‘강한 생명력’ 보여
‘MZ세대 분재’로 인기…패션화보 소품 등 디자인 측면에서 주목
거북이 등딱지처럼 생긴 ‘구갑룡’. 멀리서 보면 장미 꽃잎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날카로운 가시와 탄탄한 몸이 위협적인 ‘아가베’. 100 대 1 비율로 축소된 바오바브나무 또는 나무 토끼처럼 보이는 ‘그락실리우스’. 흙에서 뽑으면 괴성을 지르는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의 맨드레이크를 닮은 ‘파키푸스’. 모두 비현실적인 외모의 괴근식물들이다. 저 멀리 우주에서 유에프오(UFO)를 타고 불시착한 외계생명체 같은 모습이다.
괴근식물은 한자로 ‘덩어리 괴’ 자와, ‘뿌리 근’ 자를 쓴다. 몸통과 줄기, 뿌리가 한 덩어리로 팽창한 모양이 독특해 보는 순간, 괴이하다는 뜻과도 연결된다. 아프리카, 북남미, 마다가스카르에서 자생하는 다육식물이며 라틴어로는 카우덱스(caudex, 우거진 식물)라고도 한다. 굵은 줄기와 뿌리에 수분을 저장해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남는다. 엄청난 일조량과 큰 일교차를 견디기 위해 두꺼운 표피로 진화했다.
팝업스토어의 중심 서울 성수동에서는 올해 3월과 9월 괴근식물을 주제로 한 행사가 열렸다. 팝업 행사에서 한번 본 괴근식물의 독특한 외모는 쉽게 잊히지 않았다. 지난달 3일 서울 동대문구의 희귀 식물 전문점인 ‘플랜트 오하누’에 들렀는데 손가락 두마디만한 괴근식물이 7만원이었다. 가격이 만만찮다는 생각에 구경만 하고 나왔다.
3주 집 비웠어도 멀쩡한 생명력
괴근식물은 왜 비쌀까. 이들을 키우는 일은 정말 어려울까. 올해 9월 괴근식물 팝업 행사를 기획한 권민석(32)씨의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집을 지난달 27일 찾았다. 그의 에스엔에스 활동명은 에이스트리맨(acetreeman)이다. 그는 3년 전 그락실리우스를 시작으로 50개의 괴근식물을 키우고 있다.“야생 개체의 괴근식물은 저렴하진 않아요. 마다가스카르 등지에서 흙 한점, 미생물 하나 남지 않게 소독까지 마치고 뿌리 없이 들여와야 하거든요. 이걸 ‘벌크’ 상태라고 해요. 수입·배송·통관 비용을 들여 한국에 가져와도 벌크 상태의 식물이 뿌리를 내릴 확률이 10%도 안 돼요.”
마다가스카르에서도 괴근식물은 멸종위기종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정부가 승인한 식물 수출 허가량이 극히 적다. 우리나라의 아가베오브서울, 웨트룸, 고어플랜트서울 등이 괴근식물을 정식으로 수입해 판매하고 있다.
식물을 좋아해 관엽식물과 분재 등을 키워왔던 권씨가 괴근식물에 빠진 이유는 ‘강한 생명력’ 때문이었다. “괴근식물은 뿌리를 내리는 ‘발근’이 어렵지 그다음에는 쉬워요. 뿌리내린 뒤에는 외려 죽이는 게 쉽지 않다고들 말할 정도예요. 느리게 자라지만 생명력은 엄청나죠.”그는 올여름 3주간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지만, 집에 있던 괴근식물들은 누구의 돌봄도 없이 거뜬히 이 시기를 버텨냈다. “매일 세번씩 물을 줘야 하는 분재와 비교하면 괴근식물은 기르기 쉬워요. 여름엔 더운 날씨 그대로 두면 되고, 겨울엔 실내 온도와 비슷한 20도 정도에 보관하면 돼요. 물은 자주 안 주는 게 좋고요.”
지난 3년간 코로나19로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며 플랜테리어(식물을 활용한 인테리어)와 반려식물 등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괴근식물도 알음알음 알려지기 시작했다. 가격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고가의 야생 개체 대신 국내에서 씨앗을 심어 키운 실생 괴근식물에 대한 수요도 이때 생기기 시작했다. 실생 괴근식물은 온라인 식물숍에서 2만원 정도면 살 수 있다. 다만, 괴근식물을 키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뿌리가 아직 나지 않은 상태를 선호하는 문화가 있다. 수입한 뒤 국내 매장에서 발근시킨 것보다 비교적 저렴하게 희귀한 개체를 들일 수 있고 도전의식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현지에서 볕에 화상을 입은 자국, 풍화 작용으로 벗겨진 줄기, 동물의 공격을 받은 상처 등이 남아 자연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는 점도 애호가들 사이에서 인기 요인이다. 실생 괴근식물은 온실의 일정한 환경에서 재배되기 때문에 모양이 일정하다.
권씨는 수입 직후 상태가 좋지 않아 모두가 실패를 예상했던 파키푸스를 살린 경험이 있다. 긴 비행을 겪은 식물이 새집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한동안 원산지의 환경을 만들어 안정을 취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는 37도로 데운 온열 매트 위에 식물을 올리고 25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도록 설정해둔 온실에 넣어 파키푸스가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했다. “그 무렵 제게 가장 중요한 일은 파키푸스의 발근이었어요. 밖에 있으면 빨리 집에 가서 얘(파키푸스)를 보고 싶은 마음뿐이고, 집에 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도 얘를 저울에 올려 무게를 달아보는 거였어요. 식물이 수분을 제대로 머금고 있는지, 미세하게 뿌리가 자라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요. 지금은 온실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안정기에 들어섰죠.”
권씨는 괴근식물이 가진 ‘개성’이 좋다. “저는 주로 작가의 개성과 노력이 드러나는 가구와 소품을 찾아 수집하는데요. 괴근식물은 제가 모아온 빈티지 조각품과 그림, 화분과 조화를 잘 이뤄요. 좋아하는 작품과 괴근식물의 매칭을 상상하고 그게 실제로 같은 공간에서 잘 어우러질 때 정말 신나요. 괴근식물을 키우는 묘미죠.”
개성 강하니, 화분도 특별해야
음식점을 운영하는 손재영(30)씨는 에스엔에스에서 ‘콘 코리아’(con.kr)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괴근식물 애호가다. 마다가스카르 정부가 승인한 멸종위기 식물 수입 면허까지 갖고 있는 그가 현재 기르고 있는 괴근식물은 모두 40개. 괴근식물을 향한 호감은 사진 한장에서 시작했다. “식물 애호가인 어머니가 멸종위기 식물이라며 그락실리우스 사진을 보여줬어요. ‘이게 식물이라고?’ 생각하며 동시에 호기심이 일었죠. 어떻게 이런 특이한 모양으로 자라게 되었을까, 괴상한 생김새가 계속 생각이 났어요.” 손씨는 이후 괴근식물을 키우는 일본인의 에스엔에스와 커뮤니티에서 정보를 얻기 시작했다. “저는 2019년 여름에 괴근식물을 키우기 시작했어요. 당시엔 국내에 정보가 없어 일본, 홍콩, 대만의 자료를 참고했어요. 특히 일본은 괴근 문화가 오래되었고 잘 정착했거든요.”
일본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네이버후드는 산하에 괴근식물 브랜드 ‘에스알엘’(SRL)을 운영하고 있고, 일본 잡지 ‘브루투스’(Brutus)는 진기식물이라는 이름으로 괴근식물만 다루는 무크지를 발매한다. 일본 파르코나 이세탄 백화점에는 괴근식물만 따로 취급하는 섹션이 있다.손씨는 괴근식물을 활용하고 있는 외국의 다양한 사례를 덧붙였다. “시부야 파르코 백화점 3층에 가면 예술 작품 코너에 그락실리우스 피규어를 팔아요. 며칠 전에는 포켓몬스터 에스엔에스 공식 계정에 그락실리우스를 배경으로 한 잠만보 캐릭터 그림이 올라왔어요. 홍콩 디즈니월드에서는 괴근식물 브랜드와 협업해 미키마우스 피규어를 만들었고요.”
권민석씨도 괴근식물을 주제로 소품을 만든다. “홍콩과 일본엔 괴근식물 콘셉트의 재미있는 굿즈가 많아요. 저는 괴근식물을 사랑하는 식물인으로서 파키포디움 모양의 인형 키링을 만들었어요. 명품 가방에 강아지 인형을 달고 다니는 게 유행하길래 떠올렸죠. 만든 물건은 지난 팝업스토어 때 모두 소진했어요. 인기가 많더라고요.”
괴근식물 애호가는 식물뿐 아니라 식물의 이미지를 소비하고, 나아가 화분까지 맞춤 제작한다. 권씨는 무채색의 세라믹이나 녹이 슨 느낌이 표현된 동 소재의 화분을 선호한다. “괴근식물 특유의 질감이 돋보이고 아프리카 본토 느낌이 나는 걸 선호해요. 자기만의 색을 가진 개성 있는 작가의 화분이 좋고요.” 괴근식물이 심어진 화분은 특별한 존재감 덕에 패션화보 소품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강원도 고성에서 도자기를 굽고 판매하는 ‘테일 포터리’를 운영하는 곽용인(36)씨는 괴근식물 애호가들이 좋아하는 화분을 만든다. “아가베오브서울에서 협업을 하자고 연락이 왔어요. 외국에는 괴근식물에 어울리는 화분이 많은데 아직 국내에는 없다고 하더라고요. 괴근식물의 강한 이미지를 받쳐줄 수 있는 ‘블랙’, ‘고어’, ‘임팩트’ 등을 콘셉트로 작업했어요. 화분과 식물이 하나 되는 이미지를 좋아해주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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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한 조각상 같은 오브제”
독특한 외형으로 눈길을 끄는 만큼 괴근식물은 강한 임팩트가 필요한 공간에 잘 어울린다. 손재영씨는 올해 성수동에서 있었던 두번의 괴근식물 팝업에 모두 소장 식물 전시를 했다. “워낙 센 오브제처럼 생겼으니까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는 식물의 모습은 연약해 보이잖아요. 괴근식물은 견고한 조각상에 가까운 모습이에요. 유니크한 건축물의 구조, 브랜드와 잘 어울려요.”
커다란 구조물을 매장 내 설치해 기이한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국내 선글라스 브랜드 젠틀몬스터의 공간 디렉터 최우석(39)씨 역시 최근 괴근식물에 빠져 있다. 1년 반 전, 일본 괴근식물 브랜드 에스알엘을 통해 입문한 그는 일본에서 발행된 괴근식물 관련 원서와 괴근식물 관련 오픈채팅방에서 정보를 얻는다. 그락실리우스로 괴근식물을 기르기 시작한 최씨의 거실에는 파키포디움류를 비롯해 약 60개의 괴근식물이 자라고 있다. “회사에서도 제가 키우는 식물이 소문나서 동료들이 종종 구경하러 집에 와요. 아프리카 식물인 부파네 헤만소이데스를 보고는 양파 아니냐며 웃기도 하는데 그만큼 특이하단 얘기니까 오히려 좋아요.” 최씨는 “생김새가 아름다우며, 같은 문화를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어 즐거운 취미”라고 했다. “괴근식물 팝업에 가면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아요. 오토바이 좋아하고, 괴근식물 돌보는 취미가 있고, 일본 패션을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어요.”
괴근식물은 ‘엠제트(MZ)세대의 분재’라고 불리며 개인과 브랜드, 공간 등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입문자에게는 진입장벽이 높은 취미다. 권민석씨는 말한다. “국내에 괴근식물 관련 서적이 두권밖에 없는데 그마저 모두 일본책을 번역한 거예요. 아직은 국내 시장이 작은 탓이겠죠. 더 많은 사람들이 괴근식물의 매력을 알게 되어 함께 즐길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그만큼 흥미로운 분야니까요. 문화가 넓어지고 시장이 커지면 이 근사한 취미를 즐기기에 훨씬 수월할 것 같아 기대도 되네요. 내년 식목일 행사를 같이 할 브랜드와 공간, 인물을 찾고 있습니다. 함께해요!”
괴근식물을 구입할 수 있는 주요 매장(고어플랜트, 웨트룸, 누플랜트웍스)은 모두 서울 용산구 삼각지에 있다. 애호가들 사이에서 일명 ‘버뮤다 삼각지대’라고 불린다. 입문자의 경우, 야생과 실생 식물을 모두 판매하는 고어플랜트가 추천된다. 권씨는 야생 중 선별된 고급 개체를 찾는다면 웨트룸, 화분의 조화까지 생각한다면 누플랜트웍스를 방문하라고 추천했다.
조서형 지큐코리아 웹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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