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수 "나는 꿈을 이룬 사람, 나처럼 꿈꾸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나의 일"

2023. 10. 2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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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10년 만에 국제야구대회 1승
 이만수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
 라오스 야구의 아버지로 자리매김
"동남아 작은 나라의 완벽한 성공 스토리 
 스포츠는 스토리, 라오스는 스토리 황금어장"
이만수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이 야구공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이사장은 "2023년은 내 인생에서 정말 잊을 수 없는 한해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김광원 기자

"올해는 저에게 제 인생에서 정말 잊을 수 없는 한해가 될 것 같습니다. 라오스 야구가 10년 만에 국제대회(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1승을 거뒀고, 제가 결혼 후 처음으로 결혼기념일을 깜빡했습니다. 라오스로 출국하려고 공항에 앉아 있다가 아내에게 전화를 받았는데, 눈앞이 캄캄하더군요."

'최초의 사나이' 이만수. 한국 프로야구 첫 타점에 첫 홈런을 기록한 덕분에 얻은 별칭이었다. 이만수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에게 '최초의 사나이'란 타이틀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다. 지금이 오히려 더 걸맞은 별명이다. 지도자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했고 10년 전부터 동남아시아에 한국 야구를 전파해 현재 '라오스 야구의 아버지'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그가 키운 라오스국가대표팀은 얼마 전 열린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최초의 국제대회 1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베트남에 이어 캄보디아까지 야구 전파를 기획하고 있다. 이 이사장은 "할 일이 갈수록 태산이지만 내년부터는 아내에게 조금 더 신경 쓰면서 대외활동과의 균형을 맞출 생각"이라면서도 라오스 야구 관련 에피소드를 털어놓을 때면 이제 막 야구를 시작한 유소년 선수의 눈빛으로 돌변했다. 헐크처럼. 한국 야구에서 메이저리그를 거쳐 동남아야구 전파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최초'를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그 헐크 같은 열정이다. 다음은 이만수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과의 일문일답.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라오스 야구팀이 1승을 하고 난 후 주변 반응이 어땠는지.

라오스팀의 1승이 확정된 순간을 담은 동영상을 100만 이상 봤더라. 한국에서도 꽤 화제가 되었지만, 바깥에서는 더 큰 호응이 있었다.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의 벵추로 사무총장이 본선에 진출한 라오스팀의 숙소비와 항공료를 지원했고, 결국 불발됐지만 아시아야구연맹(BFA) 회장도 라오스팀 경기를 직접 보러 오겠다고 했을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다. 외국의 많은 야구 관계자들이 "동남아시아 작은 나라의 가장 완벽한 성공 스토리"로 입을 모으고 있다고 들었다. 라오스 주변국들에 끼친 파급력이 엄청나다. 뭔가 울렁울렁대는 느낌이다. 분위기가 좋다.

- 10년 만의 성과다. 그간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을 듯하다.

동남아시아에서 야구는 비인기 종목이다. 야구를 가르치고 전파한다는 것이 정말 힘들다. 허구연 KBO 총재가 누구보다 이를 잘 안다. 허 총재는 캄보디아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야구장을 짓고, 베트남 첫 야구장을 건설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내가 라오스에서 야구를 전파한 지 10년째란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면서 "정말 대단하다"고 감탄을 거듭하더라. 세세한 이야기는 끝도 없다. 다만 이미 하기로 마음먹은 일인 만큼 끝까지 간다는 생각이다.

- 아시안게임에서 라오스팀이 경기를 시작하기 전 목이 탄 듯 생수를 들이켜는 사진이 화제가 됐다. 긴장의 연속이었을 텐데, 체력적으로 부치지는 않았는지.

중국에서 보름 동안 있으면서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았다. 워낙 다양한 일들이 있었다. 너무 신경을 써서 그런지 봉와직염(피부 아래 조직에 세균이 침투해 나타나는 염증성 질환)왔다. 진통제를 먹으면서 버텼다. HBC(HIS BASEBALL CLUB) 유소년야구단을 맡고 있는 권혁돈 감독이 봉와직염에 자주 걸리는데, 보통 2~3주씩 입원할 정도로 통증이 심하다. 그때마다 '왜 저러지? 그렇게 아픈가?' 하고 어리둥절해했다. 그 병을 앓기 전에는 그렇게 아픈지 몰랐던 것이다. 약이 부족해서 한국대표팀 팀 닥터에게 항생제와 진통제를 요청하기도 했다. 내 다리를 보더니 "당뇨 있으시냐. 다리가 너무 부었다"면서 깜짝 놀라더라. 라오스에 자주 오면서 통풍도 생겼다. 워낙 더운 나라라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든다. 통풍도 걸려보니까 걷기 힘들 정도로 아프더라. 훈장이라고 생각한다.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일주일도 안 돼 라오스로 다시 들어왔다. 봉와직염이 너무 심해서 그냥 한국에 있을까도 생각했지만 루앙프라방 수파누옹국립대학교에서 야구팀 창단을 하는데 내가 창단식에 빠지면 너무 실망할 것 같더라. 부상을 안고 9회말을 뛰는 기분이지만, 마음은 행복하다.

- 루앙프라방 최초의 야구팀인가

그렇다. 의미가 깊은 일이다. 말하자면, 비엔티엔은 라오스의 중심이다. 루앙프라방에 창단되는 야구팀은 북부 지역을 대표하게 하고, 남부지역에 팀을 하나 더 창단하면 남북과 중부가 경쟁하는 구도가 형성된다. 그런 상황이 되면 라오스 야구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다. 경쟁하면 발전하게 되어있다. 우리는 그 구도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 라오스 야구 전파는 한마디로 기부이자 봉사다. 금전적으로 수십억을 쏟아부은 일이다. 오해도 많았다고 들었다.

초기에 라오스 정부 사람들이 애들 모아놓고 뭐하나 비디오를 촬영해간 적도 있었다. 이 나라의 독특한 문화도 발목을 잡았다. 선수들이 한번은 "복 받으려고 우리한테 이렇게 베푸는 거 아니냐"고 했다. 라오스식 사고다. 받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면 성장이 안 된다. 나중에 베푸는 사람이 될 수도 없다. 지금은 아이들이 고마워할 줄 안다. 사족을 달자면, 우리는 단순히 야구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야구 마인드를 전파하고 있다. 스포츠를 배우면 그 스포츠에 스며있는 정신과 마인드까지 함께 스며들게 된다. 나는 우리 선수들이 야구 정신으로 라오스를 이끌 지도자들로 성장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 롤모델이 있다면

1901년 한국에 들어와 야구를 전파한 질레트 선교사다. 그분 덕분에 내가 야구를 하게 되었고, 야구를 통해 큰 사랑을 받았다. 또 그분이 있었기에 나 같은 사람이 라오스 야구 전파에 헌신하는 것이다. 지금 이 아이들이 당장 우리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우리가 하는 일의 가치를 진정으로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걸 바라면 안 된다. 우리가 이 세상을 다 떠나고 나면 그때쯤 모든 것을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질레트 선교사가 나를 알겠는가? 모른다. 나 역시 라오스인들에게 그런 존재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10년으로는 어림도 없다. 세계적은 음악가들을 탄생시킨 엘시스테마도 수십 년에 걸쳐 노력한 결과물이다. 너무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언젠가는 우리를, 그리고 우리가 한 일을 알아줄 것이다. 우리를 기억하면서 우리처럼 헌신하고 베풀며 살아가는 라오스인들이 탄생할 것이다. 우리가 다 떠난 뒤에 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야구를 가르친다.

- 야구를 하다가 그만둔 선수들이 많다고 들었다. 허탈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늘 '1명'이 목표였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야구팀을 거쳐간 라오스 청년이 200명이다. 그들은 못해도 야구 저변 확대에 도움을 줄 것이고, 열정적인 친구들은 정치계, 의료계, 교육계에서 야구 마인드로 활약할 것이다. 또 그들 중 누군가는 '내가 이만수란 사람 덕분에 야구하게 됐다. 나도 이만수처럼 헌신하며 살자' 하는 사람이 나올 것이다. 적어도 '1명'은 그렇게 하지 않을까 싶다. 그거면 됐다. 나는 성공한 사람이다.

- 베트남에도 야구 보급이 한창이다. 동남아시아 전체에 한국 야구를 전파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힌 바 있다. 진척 정도는.

헐크파운데이션에서 부장 직책을 맡고 있는 최홍섭 씨가 최근 캄보디아 심판위원장 자리에 올랐다. 11월에 최 부장과 함께 일주일 동안 야구 아카데미를 열기로 했다. 최 부장은 심판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나는 선수들에게 야구를 가르칠 계획이다. 미얀마에도 라오스의 제인내 대표처럼 야구를 함께 전파할 분이 나왔다. 라오스를 필두로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까지 왔다.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에 야구를 전파한다는 계획이 차근차근 이루어지고 있다.

- 동남아야구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스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이번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선수 한 명을 ‘발견’했다. 17세의 '피파' 선수다. 몸놀림과 뛰어난 핸드링, 거기다가 정확한 송구까지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기본기가 완벽하다. 젊은 시절의 류중일 감독을 보는 듯했다. '피파'처럼 빨리 습득하고 재능있게 플레이 하는 선수는 찾아보기 힘들다. 수비뿐 아니라 타격도 괜찮다. 필리핀 경기에서 시속 140㎞ 빠른 볼을 상대로 깨끗한 안타를 기록했다. 무엇보다 의욕이 대단하다. 얼굴 부상에도 경기에 출전시키지 않을까봐 걱정이 돼 울었던 선수다. 한마디로 라오스인답지 않은 의욕을 보였다. 우리나라에서 몇 년, 아니 최소 1년 만이라도 훈련을 받는다면 지금보다 월등하게 기량이 향상될 것이다. '피파'가 분명 큰 역할을 해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 한국 프로야구에서 라오스 선수를 볼 날이 올 수 있을지.

라오스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 한마디로 라오스는 야구 흥행의 측면에서 '황금어장'이다. 너무도 풍부한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라오스가 '1승'을 가지고 이토록 화제가 되는 이유는 그 스토리 때문이 아닌가. 열악한 환경에서 갖가지 사연을 안고 뛰는 선수들이다. 선수들의 사연만으로 중계를 하면 경기를 9회 아니라 19회까지 진행해도 이야기를 다 못할 것이다. 나를 예로 들더라도 한국야구에서 메이저리그까지의 이만수는 너무 밋밋하다. 큰 굴곡 없이 성공적인 프로필을 쌓아올렸지만 오히려 그래서 평이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라오스를 만나면서 이만수에게 얼마나 많은 스토리가 생겼는가. 스포츠는 ‘스토리’를 먹고 자란다. 야구는 물론이고, 미식축구, 농구 모두 다양한 이야기들이 팬들의 심금을 울리고 팬층을 확장시킨다. '스토리'가 스포츠를 드라마로 만든다. '스토리'가 스포츠를 인생 이야기로 탈바꿈시킨다. 그런 스토리가 라오스에는 너무도 풍부하다. 이를테면 '피파'가 KBO 리그 1군 무대에 단 한 타석만이라도 선다면 라오스는 물론이고 동남아시아에서 큰 화제가 될 것이다. 한국 팬들 역시 동남아시아 최빈국에서 온 라오스 청년의 성공 스토리에 십분 공감할 것이다. 그런 스토리가 많아야 야구가 풍성해진다.

- 강연 활동도 열심이다. 강연과 관련해 호평을 하는 이들이 많다. 비결이 있다면

내 경험을 강의 소재로 삼는다. 이를테면, 사회학자나 심리학과 교수에게나 어울릴 '꼰대' 문화에 대한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미국에서 코치로 활동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때 한국에서처럼 선수들의 단점을 포착해서 이를 지적하고 호통쳤는데, 감독이 불러서 "선수한테 한번만 더 지적하면 한국으로 돌려보낸다"고 엄포를 놓았다. "단점을 보지 마라. 장점만 보고 이야기하라"는 것이었다. 단점을 보는 눈을 버리고 장점을 발견하는 법을 터득하기까지 한 달이나 걸렸다. 그리고 그렇게 장점을 칭찬하고 북돋아 준 선수들이 나중에는 펄펄 날더라. 장점을 보는 것, 나에게는 그것이 '꼰대'에서 벗어나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박수가 터져나왔다. 내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니 호응이 큰 것이 아닌가 싶다.

- 꿈이 있다면?

아내가 한번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이 30년 만에 이루어졌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선수 시절 구단주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이제 라오스 야구 구단주가 되지 않았느냐는 거였다. 열아홉 살 때 장훈 선배에게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는데, 시카고 화이트 삭스에서 지도자로 그 꿈을 이루었다. 거기다 구단주도 됐다. 나는 꿈을 다 이루었다.

항저우아시안게임 '1승'의 주역들이 한자리에 모여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김광원 기자

비엔티엔(라오스)=추종호기자 (choo@hankookilbo.com) 김광원 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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