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삿상 아닌 식탁에 오른 제기…재기발랄하게 피어나다 [ESC]
조선시대 금속 부족, 도자가 대세
‘백자 제기’ 단정하고 간결한 기품
굽 있는 그릇에 디저트 올려 ‘풍류’
굽이 높은 백자 그릇에 반찬을 담을 때면 문득 돌아가신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제사 때 쓰는 그릇을 밥상에 올리다니! 할머니가 보셨다면 불경스럽다며 매서운 한마디를 하셨을 것이다. 우리 집안은 유교의 가풍이 깃든 반가도 아니었고 할머니는 평생 농사를 지으셨던 촌부였지만 조상님 제사는 중요한 행사였다. 할머니는 정성스레 제수를 마련하고 나름의 예법에 따르며 4대 봉사(고조부모까지 제사를 지냄)했다.
할머니 큰아들의 첫 딸인 나에게는 제기를 닦는 임무가 맡겨졌다. 나무로 만든 제기여서 무겁지 않아 힘들지 않았고 자손으로서의 도리를 제법 해낸 것 같아 어린 마음이 으쓱했다. 대청마루에 반짝이는 제기로 줄을 세워놓고 내가 좋아하는 롤케이크나 홈런볼 과자, 복숭아 절임 같은 음식은 왜 못 올리는 것인지 궁금해하곤 했다. 제기 닦기를 하던 어린 시절에서 30여년이 흘러 이제는 여러 사정 상 제사를 지내지 않지만 손끝의 기억으로 남은 제기의 형태는 나의 도자 그릇 취향 중 하나로 발현됐다. 종종 찾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층 조선실과 3층 백자실의 도자 제기는 빼놓지 않고 보는 유물이다. 어릴 때처럼 대표적인 제기의 형태인 굽이 있는 그릇에 어떤 음식을 담으면 좋을지 그려보고 금속 제기에서 유래한 형태를 살펴보며 도자 그릇 디자인의 다채로운 확장성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고미술 골동품에서 일상으로
잊고 지냈던 도자 제기의 아름다움에 본격 매료된 것은 201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흙으로 빚은 조선의 제기’ 특별전 덕분이다. 조선 시대 도자 제기의 특징과 의미를 알게 되니 아는 만큼 보이고 애정이 생긴 까닭이다. 조선 초기인 15~16세기에는 제기의 제작교본인 ‘제기도설’의 금속 제기를 본떠 제작한 상감분청사기 제기와 백자 제기가 출현한다. 금속 재료가 부족해지면서 국가 제사의 일부를 흙으로 만든 도자기로 대체하고 금속 제기의 세밀한 장식까지 고스란히 따라 했던 시기다.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피폐해진 16~17세기에는 사회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제사가 성행하고 백자 제기의 장식이 과감하게 생략되고 단순해지면서 독창적인 제기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18~19세기는 가장 조선다운 백자 제기가 완성됐다. 양반 수가 급증하고 가문의 제사도 늘어난 이때 각 집안에서는 단정한 선과 면으로 구성된 정결한 백색의 제기를 사용했다.
지난 6월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열린 ‘조선백자 제기의 미와 현대미술과 만남’ 전시에서는 유물적 관점이 아닌 조형미에 초점을 맞춰 미술품으로 재해석한 백자 제기가 선보였다. 현대 추상화가 김환기·정상화·유희영의 절제된 추상 작품과 어우러진 백자 제기의 순수하고 간결한 형태적 미학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식을 배제하고 오로지 기하학적 선과 원형, 사각, 팔각 등 단순한 형태의 조형미와 깊은 백색으로 기품이 깃든 백자 제기는 조각 작품 그 자체였다. 조선백자를 유독 아꼈던 김환기 화백이 1950년대 파리에 머물며 그린 ‘제기’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귀한 완물로서의 감상용 도자기가 아닌 생활 도자기로 사용할 수 있겠다는 용기를 준 것이다. 굽다리 받침 위에 오목한 원형 접시가 올려진 형태의 제기에 검은 콩처럼 생긴 물체가 다섯알 정도 담겨 있는 모습이 소박하고 정겹다.
조상을 공경하고 혼을 기리며 제물을 담았던 도자 제기는 이제 더이상 유물과 고미술 골동품으로 박제되지 않고 일상의 그릇으로 변모하고 있다. 박물관·미술관에서 흠모하며 바라보던 제기에 음식을 담아 식탁에 올리고 카페에서 디저트를 작은 굽 접시에 올려 서정적 풍류를 전하기도 한다. 다채로운 미식의 향연이 펼쳐지는 레스토랑에서도 귀한 음식의 품격에 걸맞게 굽이 높은 그릇을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일상과 동떨어진 제례를 위한 경건한 기물이 아니라 스스로 아끼고 존중하고 공경하는 의미가 담긴 경배의 그릇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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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용 굽 접시에 올라간 케이크
이러한 변화는 도자 공예가들이 백자 제기의 가치를 연구하고 이어왔기에 가능한 일이다. 특히 이기조 작가의 백자 제기 작품 덕분에 순백색과 직선·곡선이 그린 간결한 조형미를 가진 백자 제기 원형의 진면목을 향유할 수 있다. 1990년대부터 조선백자를 폭넓게 연구한 이기조 작가는 백자 제기가 품은 절제된 숭고함을 일상의 용기로 묵직하고 단단하게 빚었다. 이기조 작가의 작품을 여러 점 소장하고 애용하는 문지윤 리빙 스타일리스트는 백자 제기로 식탁의 표정을 더 풍성하게 연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단정하고 담백한 백자 제기는 음식의 국적이나 종류에 제약을 받지 않아요. 커다란 굽 접시에 케이크나 시루떡, 제철 과일을 올리면 센터피스 역할도 톡톡히 할 수 있습니다. 개인용 앞접시도 굽이 있는 형태를 사용하면 식탁에 리듬이 생기죠.”
서울 청담동에 있는 ‘노영희의 그릇'에서 오는 11월3일까지 열리는 ‘굽이 있는 그릇’ 전시에서는 청자와 분청사기, 은채 백자 등 다양한 기법과 형태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이곳은 푸드 스타일리스트이자 ‘미쉐린 가이드’ 1스타를 받은 레스토랑 ‘품’의 노영희 셰프가 운영하는 그릇 가게다. 음식과 그릇을 다루는 노영희 셰프의 기획으로 이강효·이창화·이정용 등 도예가 12인이 함께 굽이 있는 그릇을 만들었다. “밥상 위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아이템이라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주로 제를 지낼 때 사용한 제기였지만 지금은 포인트 그릇으로 특별함을 더할 수 있습니다.” 노영희 셰프의 말이다.
전통예법의 하나인 ‘시례’(時禮)는 ‘시대 흐름에 부합하는 예’라는 뜻이다. 조상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마음은 변함없어야 하지만 형식은 환경과 주어진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미로 해석해본다. 여전히 형식에 얽매인 전통과 예법에 시례를 적용하면 유연하게 확장된 문화 자원은 무궁무진해진다. 한층 재기발랄하게 피어난 제기처럼 말이다.
박효성 리빙 칼럼니스트
잡지를 만들다가 공예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우리 공예가 가깝게 쓰이고 아름다운 일상으로 가꿔주길 바라고 욕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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