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점찍은 그림, 불태워야 뜬다…‘불타는 작품’[책과 삶]
윤고은 지음|은행나무|340쪽|1만6800원
배달 라이더 ‘화가’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죽은 빵 되살리는 오븐’ 같은 로버트 재단
전폭 지원…단 하나의 조건은 ‘작품 소각’
안이지는 화가이자 미술학원 강사였다. 팬데믹으로 더 이상 학원을 유지할 수 없게 됐다. 당장 생계를 위해 음식 배달 ‘빨리’ 앱의 라이더로 뛰었다. 쉐이크쉑 버거를 반경 600m 거리까지 8분 만에 배달해도 ‘별점 테러’를 받는다. 배달 앱을 끄자 태평양 건너 로버트 재단에서 전화가 왔다. 스팸전화가 아니었다.
안이지는 한때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 유명한 작가가 될까봐 두려웠는데 진짜 불안한 건 따로 있었다. 재능이 뛰어난 친구는 갑자기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고 하나 둘 예술계를 떠났다. 안이지도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을 잊어갈 때, ‘죽은 빵도 살려낸다는 오븐’과 같은 로버트 재단의 전화를 받은 것. 이곳을 거쳐간 작가는 무조건 떴다.
“소각? 혹시 ‘구매’가 ‘소각’으로 잘못 번역된 것은 아닌지, 인쇄상의 오류가 아닌지 의심했는데 그건 정말 작품을 불태우는 행위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은유나 상징의 표현도 아니었다. 정말 불태운다고 했다.”
파격적 지원을 받고 4개월간 작업한다. 조건은 마지막 날 로버트 재단의 이사장 격인 ‘로버트’가 점찍은 작품 하나를 소각해야 한다는 것. 계약서에는 로버트가 발의 인장을 찍은 작품이 피자 화덕 같은 소각로로 들어간다는 조항이 적혔다.
소설 <밤의 여행자들>로 영국 추리작가협회가 주관하는 대거상을 수상한 윤고은이 장편소설 <불타는 작품>을 출간했다. 상상과 현실, 4차원의 세계 어디쯤 있을 법한 내용으로 재치 있고 유쾌한데, 읽으면서도 읽고 나서도 여러 번 곱씹게 되는 소설이다. 그래서 <불타는 작품>은 요즘, 읽히는 책이다.
소설은 그랜드캐니언에서 젊은 남녀가 프러포즈를 하는 사진으로 시작한다. 휴대전화 카메라에 담긴 젊은 남녀는 600㎞ 떨어진 조슈아트리 국립공원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젊은 남녀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자 생의 마지막을 담은 사진을 찍은 이가 로버트였다. 로버트는 나비 귀를 가진 파피용종 개다. 사진 속 여자의 아버지이자 사업가인 발트만 회장은 딸의 마지막 순간을 담은 로버트와 함께 예술재단을 세운다.
작품 하나를 소각한다는 계약서에 사인한 안이지는 로버트 재단이 있는 Q 도시와 작업실에서 ‘블랙코미디’ 같은 장면을 마주한다. 같은 주제를 지독하리만큼 똑같은 패턴으로 반복하는 로버트와의 만찬과 산책. 로버트의 말은 블랙박스와 통역사를 거쳐 안이지에게 전달된다. 개의 말을 걸러준다는 블랙박스는 어떻게 작동되는 걸까. 그토록 훌륭한 물건이라면 왜 상업적으로 팔지 않을까. 통역사는 로버트의 말을 제대로 옮기고 있을까. 작품을 정말 소각해야 할까. ‘개’ 로버트는 정말 훌륭한 미적 감각을 가졌을까. 안이지의 궁금증과 두려움은 독자의 그것이 된다. 책은 추리소설도 아닌데 결말까지 가는 여정 내내 두근거림을 안겨준다.
‘개’가 인간의 예술성 판단
자본주의 작동 방식 보여줘
상상과 현실 절묘하게 맞닿는 묘사
왜 하필 ‘개’였을까.
소설은 일단 ‘개’라는 존재가 인간의 예술성을 판단할 수 있다는 점부터 독자의 익숙한 통념을 깬다. ‘개’가 점찍은 작품을 ‘불태운다’는 설정은 예술과 자본주의의 불편한 관계를 유쾌한 방식으로 내보인다. 개가 점찍은 작품을 태워 없애면서 그림의 값어치는 더 상승한다. 동시에 작가의 자존감은 무너진다. ‘개’와 ‘불’은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누군가 찍은 작품을 불태운다는 설정은 윤고은이 오래전부터 구상해온 장치였다. 그가 소설을 구상하던 중 실제로 2018년 영국 작가 뱅크시는 자신의 그림이 경매에서 낙찰되는 순간 그림 절반가량을 파쇄됐다. 돈으로 미술품을 사고파는 행위를 비판한 것이다. 그의 의도와 달리 낙찰자는 파쇄된 절반의 그림을 인수했고 값어치는 더 상승했다. 상상과 현실이 절묘하게 맞닿는 순간이다.
“그가 내민 휴대폰 화면 속에서 나는 그저 하나의 점에 불과했다.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 두 발… 어떤 이동수단을 사용하든 나는 그저 동그랗고 파란 점으로 요약되었다. 갑작스러운 후문 폐쇄, 보도블록 교체나 수목 소독, 엘리베이터 고장 등 진입 불가 상태가 되는 게 이 모바일 지도 안에 다 담겼다면, 그래서 누군가의 사정이란 것에 대해 헤아릴 수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나를 고장난 마우스 커서 취급을 하는 사람 앞에서 길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작가는 소설 속 주인공인 예술가가 일상을 살고 있는 우리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윤고은은 기자와 통화하며 “최근 몇년간 관심을 가지고 본 것이 플랫폼상의 지도 이미지였다. 배달 앱 같은 경우 다른 모든 내용이 생략된 채 필요한 것만 나온다”며 “현대인 대부분이 지도 위에서 커서처럼 깜빡이는 점으로만 요약되는 잔혹한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자기가 보고 싶은 부분만 프레임에 담아 기억하는 발트만 회장이나 ‘로버트가 선택한 작품을 작가가 사랑하게 되는 구조’라는 점만 강조하는 재단 직원 대니, 번민과 고통을 겪는 안이지 등 등장인물에는 지금을 살아가는 ‘너와 나, 우리’의 모습이 겹친다.
안이지는 소설의 마지막에 은밀한 저항을 시도한다. 소설은 그의 선택이 성공인지 실패인지 판단하기 어렵게 끝난다. 윤고은은 ‘작가의 말’에서 “영화 <트루먼 쇼>를 다시 봤을 때 나를 사로잡은 것은 트루먼이 후보 다섯 명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라며 “세트장 밖으로 나간 트루먼의 삶 못지않게 하마터면 트루먼이 될 뻔했던 다른 이들의 삶도 궁금하다”고 했다. 이 궁금증이 소설의 여러 출발점 중 하나였다고 한다. 소설의 결말을 보고나면 안이지의 저항 이후의 삶은 행복했을까 궁금해진다.
“지금까지 쓴 소설 중에 가장 관심 있는 내용을 집약적으로 많이 담았어요. 발레에서 회전 동작을 할 때 한 점만 바라보고 돈다고 하잖아요. 다른 일을 하다가도 몇년간 바라봤던 한 점처럼 저에게는 각별한 소설이에요.”
임지선 기자 vision@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강혜경 “명태균, 허경영 지지율 올려 이재명 공격 계획”
- “아들이 이제 비자 받아 잘 살아보려 했는데 하루아침에 죽었다”
- 최현욱, 키덜트 소품 자랑하다 ‘전라노출’···빛삭했으나 확산
- 수능문제 속 링크 들어가니 “김건희·윤석열 국정농단 규탄” 메시지가?
- 윤 대통령 ‘외교용 골프’ 해명에 김병주 “8월 이후 7번 갔다”···경호처 “언론 보고 알아
- 이준석 “대통령이 특정 시장 공천해달라, 서울 어떤 구청장 경쟁력 없다 말해”
- “집주인인데 문 좀···” 원룸 침입해 성폭행 시도한 20대 구속
- 뉴진스 “민희진 미복귀 시 전속계약 해지”…어도어 “내용증명 수령, 지혜롭게 해결 최선”
- 이재명 “희생제물 된 아내···미안하다, 사랑한다”
- ‘거제 교제폭력 사망’ 가해자 징역 12년…유족 “감옥 갔다 와도 30대, 우리 딸은 세상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