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와인] ‘혼란의 시대에도 오로지 正道를’ 베린저 나파밸리 카베르네 소비뇽
미국인들에게 1920년대는 굿 올드 데이스(good old days)였다. 모든 것이 풍요로웠다.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은 폐허로 변했다. 멀리서 지켜 본 미국은 반대로 전쟁 특수(特需)를 누렸다. 1929년 대공황이 닥치기까지 미국 경제는 10년 내내 호황을 누렸다. 연 평균 경제 성장률은 9%대에 달했다.
근대 미국의 절정기였다. ‘미국’하면 떠오르는 상징들이 이 시기를 기점으로 시작했다. TV에 앞서 최초 미디어였던 라디오가 미국 1가구 당 1대 수준으로 퍼졌다. 자연스럽게 대중음악, 토크쇼, 스포츠 중계가 자리를 잡았다. 찰리 채플린이 대표하는 대중 문화, 매스 미디어 시대가 이 때 열렸다.
지금도 미국에선 1920년대 전후를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라 부른다.
모두가 웃던 이런 호황기에 오로지 주류업계는 웃지 못했다. 와인 본산이었던 유럽은 전쟁으로 포도밭이 송두리째 뒤집혔다. 농사를 지을 인력도 부족했다.
미국에서는 금주령(禁酒令·the prohibition law)이 떨어졌다. 다른 이들이 풍요로운 광란에 빠져있을 때, 미국 주류업계는 고단한 혼란에 휘말렸다.
미국은 1776년 영국에서 건너온 청교도들이 중심이 돼 세운 나라다. 청교도들은 성경에 써있는 문자를 그대로 믿는 독실한 신앙과 금욕주의를 내세웠다.
이들은 건국 초기 개척 과정에서 고단한 하루를 술로 달랬다. 그러나 건국 후 50여년이 지난 1820년대부터 기독교 단체와 여성 단체를 중심으로 “음주는 가정폭력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이고, 하층 노동자 계급의 빈곤과 근무 태만을 불러 정치적 부정까지 조장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금주 운동은 탄력을 받았다. ‘전쟁 중인데 술이 웬말이냐’는 인식이 힘을 얻었다. 술을 만드는 데 쓰이는 곡물을 아껴 군량으로 비축해야 한다는 의견도 거셌다. 적국이었던 독일 출신 이민자들이 양조업으로 부(富)를 쌓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결국 1917년 미국 전역에서 술 제조, 판매·운반, 유통·수출입까지 모두 금지하는 수정헌법 18조가 국회를 통과했다. 1920년에는 마침내 금주법이 발효됐다. 기독교와 여성 단체가 금주 운동을 벌인 지 꼭 100년 만이었다.
한창 성장하던 미국 와인업계는 순식간에 암흑기에 빠졌다.
제조는 물론 판매·운반, 유통·수출입에 걸쳐 술과 관련이 있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도산하는 업체가 부지기수로 나왔다. 1919년 금주령 발효 직전 1000여곳 정도였던 미국 와이너리 수는 1934년 금주령 폐지 직후 150여곳으로 줄었다. 15년 만에 85%가 사라졌다.
일부 와이너리는 밀주(密酒)를 만들어 팔았다. 포도 주스로 가장한 와인을 버젓이 약국 선반에서 팔기도 했다. 몰래 담근 술을 대신 팔아주는 불법 조직들은 이런 식으로 거액을 거둬 들였다. 전설적인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가 이때 세력을 불렸다. 이들 이야기는 이후 여러 영화와 드라마 소재로 다시 태어났다.
1876년 문을 연 베린저(Beringer)는 위기를 극복하겠다고 이런 꼼수를 쓰지 않았다.
베린저는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에 자리잡은 와이너리 가운데 1세대다. 1868년 독일 마인츠에서 미국 뉴욕으로 건너 온 제이콥 베린저와 프레드릭 베린저 형제는 고향과 비슷한 포도밭을 찾아 헤메다 캘리포니아에 터를 닦았다.
일찍부터 자리를 잡은 덕분에 베린저는 미국 와인 브랜드로서는 수많은 ‘최초’ 타이틀을 따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와인을 보관할 인공 동굴과 지하실을 운영했고, 최초로 중력을 이용한 와인 양조 시설을 설치했다.
선진 기술은 그에 맞는 품질을 불러왔다. 베린저는 1887년 샌프란시스코 공학기계 엑스포에서 처음 와인으로 상을 받았다. 문을 연 지 20년이 채 지나지 않아 거둔 성과였다.
베린저는 1920년 금주령이 떨어지자 창립 이후 받은 상장을 전부 긁어 모아 연방정부를 찾아갔다. 당시 미국에는 아일랜드계와 독일 이민자를 중심으로 천주교 신자가 세를 불리고 있었다. 이들은 주말 천주교 미사를 집행할 때마다 미사주가 필요했다. 베린저는 ‘이들을 위해 금주령 기간에도 종교적 성찬을 위한 와인만큼은 만들 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금주령이 풀리기 까지는 13년이 필요했다. 베린저는 1933년 금주령이 사라질 때까지 13년을 미사주를 만들며 근근히 버텼다.
헛된 시간은 아니었다. 다른 와이너리가 문을 닫거나, 몰래 와인 만들기에 열중하는 동안 베린저는 온전하게 미사용 와인을 만드는 브랜드로 그 명성을 유지했다.
이때 쌓은 인지도는 금주령이 없어지자마자 빛을 발했다. 베린저는 금주령 철폐 직후 1939년부터 미국 와이너리 가운데 처음으로 와이너리 투어를 시작했다. 초기에는 사람들을 불러 모이기 쉽지 않았다. 지금에야 와이너리에서 햇빛이 쏟아지는 포도밭을 바라보며 와인을 한 잔 하는 모습이 탄성을 자아내지만, 당시는 금주령을 이제 막 거둬들인 시기였다.
베린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만국박람회 관람객들에게 직접 나파밸리 지도를 나눠주고, 클라크 게이블 같은 당대 할리우드 스타들을 직접 초대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그 결과 나파밸리는 현재 전 세계 와인 산지 가운데 와인 시음 프로그램이 가장 잘 갖춰진 곳으로 떠올랐다.
베린저 나파밸리 카베르네 소비뇽은 베린저를 대표하는 간판 제품이다. 베린저에는 터전과 같은 나파밸리에서도 목 좋은 포도밭을 선별해 그곳에서 자란 포도만을 사용해 만든다. 매년 달라지는 작황을 감안해 일단 각 포도밭 별로 와인을 만든 다음, 양조가들이 모여 신중하게 그 해 섞는 비율을 결정한다.
이 와인과 베린저 큐 나파 밸리는 2023 대한민국 주류대상 신대륙 레드와인 6만~10만원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이보다 더 넓은 지역에서 거둔 포도를 미국산 참나무통에서 숙성해 만든 베린저 브로스 카베르네 소비뇽은 3만~6만원 대상으로 꼽혔다. 그만큼 베린저가 넓은 가격대에 걸쳐 수준급 와인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다. 수입사는 금양인터내셔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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