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의 올리브 나무 아래[김창길의 사진공책]
요르단강 서쪽 너머 팔레스타인 마을 살피트(Salfit)에는 우람한 올리브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지금쯤 살피트에서는 웃음소리와 노랫가락이 울려 퍼졌을 것이다. 10월 말은 올리브 수확철이기 때문이다. 황금빛을 머금은 이곳 올리브가 세계 최고라고 칭찬하는 이도 있다. 15년 전 이맘때쯤, 올리브 숲을 지나던 한 이방인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숲의 노동이 그를 깨우친다. 올리브 수확은 오직 돈벌이를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고. 이방인은 가슴 주머니 속의 수첩을 꺼내 적는다. “올리브 숲의 노동”이란 “여기 태어나 지상의 한 인간으로, 역사의 전승자로, 하늘과 땅 사이 온 생명 공동체의 주체로, 나와 우리가 만나서 서로의 존재를 빛내는 일이다.”
광야에서 지칠 때면 이방인은 절룩거리며 올리브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올리브 숲은 그의 비밀한 수도원. 이방인은 이곳에서 “천년의 사랑”을 느낀다.
“올리브나무가 천 년을 살아도 이토록 / 키가 크지 않는 건 사랑, 사랑 때문이다. / 하루하루 온몸을 비틀며 자신을 짜 올려 / 사랑으로 피고 맺은 좋은 것들을 다 / 아낌없이 내어주고 바쳐왔기 때문이다. / 보라, 구멍 나고 주름 깊은 내 모습을. / 내 상처의 성흔(聖痕)을. 이 모습 그대로가 사랑이니.”
붉은 광야의 아이들은 그 이방인을 “샤이르 박”이라고 불렀다. 샤이르는 시인이라는 뜻. 한국에서는 한때 “얼굴 없는 시인”이라 불렸다. 그래도 시집에 이름 석 자는 적어야 했기에 필명을 달았다. 우리는 필명에 간직된 뜻을 기억한다.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 박노해는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 새벽 쓰린 가슴 위로 / 차가운 소주를” 부으며 시를 짓던 노동자다. 독재 정권의 금서 조치에도 시집 <노동의 새벽>은 100만 부 가까이 발간됐다. 글 꽤나 쓰는 노동자만은 아니었다.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한 단체도 만들었다. ‘반국가단체 수괴’라는 죄목으로 사형을 구형받고 환하게 웃으며 법정을 나서는 그의 사진을 본 이후에야 우리는 얼굴 없는 시인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시인은 말했다. “내가 사형장에서 사라지더라도 더 많은 박노해가 나타나 노동자 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건설해주길 바랍니다.”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시인을 특별사면했다. 7년 6개월이라는 세월 동안 우리 사회는 좀 변했던 것이다. 시인의 바람처럼 노동자 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는 아닐 테지만, 반국가단체 ‘수괴’라는 흉포한 단어로 생명을 빼앗지 못할 정도의 민주화는 성취했다. 출소 후, 자기가 유명 인사가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인은 곤혹스러웠다. 그는 결심했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 생명, 평화, 그리고 나눔을 위한 비영리단체 ‘나눔문화’가 탄생한 배경이다. 그는 몸소 나눔문화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반전평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2003년 전쟁터로 떠났다. 물론, 시인은 전사가 아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 곁에 있어 주는 것뿐이었다.
국경을 넘자 시인은 한 가지 난관에 봉착했다. 몸은 나라의 경계를 넘어섰지만, 언어는 그럴 수 없었다. 시인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항상 지니고 다녔던 두 개의 물건이 있다. 수첩과 낡고 작은 필름 카메라. 수첩이 시인의 기억을 보조하는 외장 하드였다면, 카메라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소통의 수단이었다. 같은 장소를 다시 찾은 이방인을 보며 “샤이르 박!”이라고 외치며 반겨주는 이들에게 시인은 첫 번째 방문 때 찍었던 사진을 건네준다. 박노해에게 중요한 것은 시인이나 혁명가의 타이틀이 아니다. 한 인간은 그가 하는 노동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박노해라고 불리는 이가 운전대를 잡으면 노동자이고, 사회 변혁을 위해 동료들과 두 손을 불끈 쥘 때는 혁명가가 되는 것이며, 펜을 잡던 손이 카메라를 움켜쥐면 사진가가 될 뿐인 것이다.
박노해의 노동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가 믿는 유일한 사랑은 “발바닥 사랑”이다. 왜냐하면 “머리는 너무 빨리 돌아가고, 생각은 너무 쉽게 뒤바뀌고, 마음은 날씨보다 변덕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은 그렇지 않다. 발이 가는 곳에 머리와 가슴도 따라갈 수밖에 없으니까. 발이 가는 곳에서 사람을 만나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이며, 결국 삶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손이 하는 일도 발의 흔적을 기록하는 일이다. 하나의 손이 펜을 들고 수첩에 적는다면, 다른 하나는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박노해는 “현장에 딛고 선 나의 발바닥, 대지와 입맞춤하는 나의 발바닥, 나의 두 발에 찍힌 사랑의 입맞춤, 그 영혼의 낙인”이 사진이라고 그의 사진집 <나 거기에 그들처럼>의 서문에 적는다.
참혹한 가난과 분쟁의 현장에서 박노해의 카메라 렌즈는 감각적일 찰나의 장면을 쫓지 않는다. 군인이 총에 맞는 순간이나 상륙 작전의 긴박함, 혹은 독수리가 지켜보는 아사 직전의 어린이를 극적인 구도로 담아내는 것은 보도사진가의 몫이다. 박노해가 사진에 담고자 했던 것은 가난과 분쟁의 뿌리와 지문들이었다. 그는 그들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경외의 마음으로 다가서야 온전한 그들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사진에 대한 깨달음을 박노해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내가 사진 속의 사람들을 찍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카메라를 통해 내 가슴에 진실을 쏜 것이다.” 나는 박노해의 글을 읽으며 그에게 사진에 대해 조언을 해주었다는 강운구 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강 작가는 문인과 예술인의 초상을 담은 사진집 <사람의 그때> 서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결정은 늘 찍히는 이들 스스로가 하는 것이었고 나는 말없이 그 사람들의 행위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쟁쟁한 사진가들이 박노해의 사진 작업을 도왔다. 10여 년간 찍은 사진을 골라 준 이는 월간 ‘사진예술’의 이기명 발행인이었다. 필름 매거진에 담긴 “영혼의 낙인”을 인화한 사람은 흑백사진연구소 유철수 대표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이상엽은 박노해와 어울리는 카메라를 추천했다. 35㎜ 단렌즈가 달린 작고 낡았지만 튼튼하고 묵직한 필름 카메라였다. 편의성을 따지자면 좋은 점수를 매길 수는 없는 조합이다. 렌즈가 보는 장면과 뷰파인더를 통해 사람의 눈이 보는 장면이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이안 리플렉스 방식이고, 초점은 수동으로 링을 돌려야 하며, 한 번의 셔터 누름에 한 컷만 찍힌다. 먼 것을 당기고, 가까운 것을 더 넓게 보여주지 못하는 단렌즈로 원하는 구도를 담기 위해서는 사진가의 몸이 분주히 움직여야 한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셔터를 누르기 전에 충분히 준비하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괜찮은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카메라인 것이다. 이렇게 느려터진 카메라로는 감각적인 장면을 포착하기 어렵다. 하지만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사진가에게는 아주 적합한 기계일 수도 있다. 그래서 박노해와 제법 잘 어울리는 장비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그 사건이 발생한 삶의 뿌리로 스며들어” 가고자 했다.
지도에도 없는 유민의 땅을 밟으며 카메라를 든 시인은 “아름다운 것들은 다 제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 질 무렵 들려오는 아잔(기도) 소리,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빵 굽는 연기, 자갈밭에서도 맨발로 축구를 하는 아이들, 그리고 사막 지평에 서 있는 올리브 나무들…. 천년을 산다는 올리브는 백 년도 살기 힘든 광야의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어머니는 올리브 나뭇가지를 손질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많은 일이 있었지요. 땅을 빼앗기고 길을 빼앗기고 앞을 빼앗기고, 아이들이 자라나 청년이 되면 하나둘 죽어가고….” 첫 번째로 올랐던 올리브 나무에 기대어 씨익 웃던 열두 살 소년 마흐무드는 말했다. “제가 잘못하고 부끄러운 날에는요, 이 나무에 속삭이며 기대 울기도 해요. 저도 이 올리브나무처럼 단단하게 자라서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폭격 속에 살아남은 레바논 베이루트의 한 올리브 나무는 잿빛 먼지를 뒤집어쓴 채 새잎을 내밀고 있었다. 폐허 더미를 헤치던 여인들은 말했다. ‘희망의 나무입니다!’ 시인은 생각했다. ‘이것도 희망이라고…. 그래, 이것이 희망이라고.’
지난달 출간된 <올리브나무 아래>(느린걸음)는 박노해의 여섯 번째 사진에세이집이다. 책에 실린 짧은 글과 사진들은 서울 종로구 ‘라 카페 갤러리’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주홍빛 토분에서 자라는 키 작은 올리브 나무 한 그루가 갤러리 입구를 지키고 있는데, 관람은 무료다. 짐작하겠지만, 사진 작품과 책의 판매 수익은 평화와 생명, 그리고 나눔의 활동을 위해 쓰인다. 아낌없이 주는 천년의 올리브 나무처럼 말이다. 나는 그의 사진에세이집을 읽고 전시장을 찾기를 재차 반복했다. 혹시나 카메라를 든 시인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기에. 하지만 시인은 산골 마을에 머물며 글을 쓰고 있단다. 지난 30년간 고민했던 ‘적은 소유로 기품있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철학이다. 매주 화요일 아침에 시를 한 편 보내오기도 한다. 지난 화요일에 발송된 ‘박노해의 숨고르기’를 몇 자 옮겨 본다.
“가을이면 돌아오리라 / 핏빛으로 돌아오리라 / 구멍 뚫린 열매같은 상처난 몸에 / 하늘빛 받으며 돌아오리라 … 저문 들길에 어린 것을 등에 업고 / 희망의 씨알로 돌아오리라”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 ‘아인 알 할웨’에는 ‘자이투나’라는 이름의 학교가 있다. 자이투나는 올리브라는 뜻이다. 2006년 ‘나눔문화’ 회원들의 도움으로 시인이 세운 학교다. 난민촌 아인 알 할웨에서 보이는 것은 하늘밖에 없었단다. 나무 한 그루 심을 땅 조차도 없다. 그래서 시인은 학교의 이름을 자이투나라고 지었나보다. 이것도 희망이라고. 그래, 이것이 희망이라고.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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