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도서관] 나무가 여우처럼 붉게 변할 때… 정반대 우리도 친구가 될 수 있지
여우 오는 날
천옌링 지음·그림 | 박지민 옮김 | 리틀브레인 | 40쪽 | 1만6000원
“그릉 그릉, 그르릉!” 배는 눈처럼 하얗고 털은 단풍잎처럼 붉은 어린 여우가 홀로 선 나무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댔다. “겁내지 마, 해치지 않아. 우리,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나무의 말은 다정했지만 여우는 도리어 발톱으로 힘껏 나무 등걸을 할퀴고 가버리곤 했다.
여우는 몇 번 더 나무 앞을 지났다. 나무는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말을 걸었다. “언젠가 내가 너처럼 붉고 하얗게 바뀐다면, 우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여우가 그제야 반들반들 윤이 나는 까만 코를 쳐들고 말했다. “너하고 난 완전 달라. 그렇지만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그렇게 하지.”
눈보라가 몰아친 이른 초겨울, 여우는 나무둥치 구멍에서 추위를 피했다. 마침내 눈이 그친 아침, 밖에 나와 나무를 올려다 본 여우는 깜짝 놀란다. 가을을 지나며 나뭇잎들이 모두 붉고 하얗게 물들었던 것이다. “알았어. 해마다 네가 지금처럼 나 같은 모습이 될 때, 그 때 너에게 올게.”
마음을 여는 데 오래 걸리는 이도 있다. 가까워지면 부담스러워 일부러 시간과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한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나무와 쉼 없이 떠도는 여우라면, 둘의 마음이 서로에게 닿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마다 겨울이면 여우는 붉은 옷을 갈아입은 나무 곁으로 왔다. 시간은 바람처럼 빠르게 흘러, 나무가 초록 빛과 붉은 빛을 오가기도 여러 번. 어느 해엔가는 나무둥치 구멍에서 새끼를 낳아 기르기도 했다. 봄이 오고 나뭇잎이 파릇파릇 새 잎이 돋으면 여우는 다시 떠났다. 나무는 궁금했다. “내가 초록이 될 때 너는 어디로 가?” 여우는 말했다. “내가 너처럼 초록이 된다면 그때 말해 줄게.”
늙고 지친 여우가 나무 곁으로 찾아와 깨지 않는 잠에 들고 또 몇 해가 지난 뒤에야, 나무는 여우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 긴 시간을 돌아왔지만, 닿지 못할 것 같았던 두 마음은 마침내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강렬하면서도 섬세한 캐릭터, 여백을 풍성하게 활용하는 구도가 영화를 보는 듯한 생동감을 빚어낸다. 나무가 여우를 다정히 부를 때면 이파리들이 파르르 떨리는 듯하다. 천천히 넘기며 자세히 들여다 보면 더 깊이 와 닿는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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