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팡이가 점령한 도시에서도 인간은 별, 노을, 바다를 꿈꾸네

이영관 기자 2023. 10. 21. 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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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만에 출간된 김초엽 장편소설
파견자들

파견자들

김초엽 소설 | 퍼블리온 | 432쪽 | 1만9000원

이처럼 빛나는 디스토피아가 또 있을까. 소설은 곰팡이와 유사한 ‘범람체’란 생물이 지구를 점령하며, 인간은 지표 아래로 쫓겨나게 된 미래를 그린다. 지구를 점령한 범람체에 대한 묘사가 눈길을 끈다. “도시는 기이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색채로 일렁이는 세계. … 도시를 점령한 범람체들이 각자 경쟁이라도 하듯 빛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많은 SF가 디스토피아를 그려내고 있지만, 그 모습이 이처럼 매혹적인 것은 흔하지 않다. 노을, 바다와 같은 지구의 자연이 더 이상 생각나지 않을 만큼.

가질 수 없는 아름다움 앞에서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은 양가적이다. ‘매료’와 ‘증오’. 이 두 감정이 소설 전반을 이끌어 간다. 범람체는 단순히 지구를 점령했다는 것 말고도, 그와 접촉한 인간의 자아를 분열시킨다는 점에서 적으로 인식된다. 지상으로 나가 이들과 싸워야 하는 ‘파견자’에게 두 감정의 간극은 더욱 크다. 주인공 ‘태린’은 자신도 모르게 지상을 동경하며 자랐다. 꿈에 그리던 파견자 시험을 치르는 도중, 환청이 들려온다. “왜 증오를 품어야 해?” “(파견자는) 무언가를 끔찍하게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불태워버리고 싶을 만큼 증오해야 합니다”라는 시험 교관 말에 대한 응답이었다.

소설은 태린이 이 환청의 정체를 찾는 과정을 통해 ‘나’라는 존재의 경계에 의문을 던진다. 자아와 지능을 가진 환청이다. 태린은 그로부터 도움을 받아 파견자가 된다. 그에게 자아를 빼앗겨 큰 실수를 저지르며, 정체성 혼란을 겪기도 한다. 그럼에도 임무를 맡아 지상으로 나가고, 기억이 지워진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며 점차 깨닫는다. 인간의 감각을 넘어선 세상이 있으며, ‘나’라는 존재는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고. 소설 후반부에 이를수록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재미가 크다. “나는 너의 일부가 될 거야. 너는 나를 기억하는 대신 감각할 거야”라는 에필로그 문장이 소설의 핵심이라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될 터다.

작가가 그려낸 곰팡이의 세계를 읽다가 문득 주변을 돌아보면, 오감이 예민해져 있음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눈물을 흘린 것 같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그 끈적거리는 것들이 눈물을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었다”와 같은 표현, 인간 수십 명이 연결된 ‘늪인’에 대한 묘사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감각을 세밀하게 담아냈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처럼 연결돼 살아가는 범람체의 사고다. “우리는 너희가 지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몰랐어. 그래서 우리의 부분들은 단지 본능을 따라서, 사방으로 가지를 뻗쳐”나갔다는 대목에 이르면, 작가가 왜 디스토피아를 아름답게 그려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김초엽 작가

젊은 세대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김초엽이 2년 만에 발표한 장편이다. 예스24 10월 3주 기준 소설 1위, 종합 5위. 작가 자신이 “역동적으로 가보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듯, 소설의 페이지를 넘기는 힘이 전작들에 비해 강하다. 다만 식물이 지구를 지배한다는 설정으로 10만부 넘게 팔린 첫 장편 ‘지구 끝의 온실’(2021)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최근 열린 간담회에서 “인간성의 핵심적 특징 중 하나가 ‘우리는 각자 따로 떼어진 개인이다’라는 객체 중심적 사고다. 1인칭 시점으로만 평생을 살아가는 이 특성이 인간의 한계를 만들기도 한다”며 “소설을 통해 객체 중심적 사고를 벗어난 경험을 어떻게 (독자가) 경험하게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말했다. 또 “제 작품을 비롯해 SF는 미래를 불확정적이고 표류하는 것처럼 그리는 경우가 많다”며 “그럼에도 거기엔 낙관이 필요하다. 무조건적 낙관이 아닌, 사회를 좀 더 낫게 만들어 가기 위한 것이다”라고 했다.

작가의 말처럼, 비관 속에서 새어 나오는 낙관의 빛이 작품을 아름답게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물들은 빛을 보지 못하는 지표 아래에서도 별과 노을, 바다를 꿈꾼다. 이들은 비관적 현실에서 그 너머를 바라보려는 노력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일깨운다. “밤의 바다는 많은 색깔들을 품고 있었다. 온몸으로 감각되는 빛의 조각들을.” 소설 말미 눈을 감으며 세상을 다르게 감각하는 태린의 이 모습이 우리 모습과 얼마나 다른지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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