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게 선택받지 못한 젊은 남성들의 분노... 이것은 '극단적 테러리즘'이다 [책과 세상]
편집자주
책, 소설, 영화, 드라마, 가요, 연극, 미술 등 문화 속에서 드러나는 젠더 이슈를 문화부 기자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봅니다.
"여자들이 강간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사회에서 진짜 피해자는 남자다."
"정치적 올바름이 광기를 부려 백인 남자들이 박해를 당하고 있다."
영국 전역의 학교에서 청소년들에게 성평등 강의를 하던 베스트셀러 작가 로라 베이츠는 어느 날부터 수상할 정도로 똑같은 남성 청소년들의 여성 혐오 주장과 마주한다. 스코틀랜드 농촌과 런던 중심부를 막론하고. 잘못된 통계를 바탕으로 한 이런 주장들은 한결같이 "남성은 피해자"라는 서사를 함축했다. 거의 같은 시기부터 언론인, 정치인 할 것 없이 똑같은 표현의 주장을 목격한 베이츠는 은밀한 온라인 세상에서나 통용되던 언어와 메시지가 점점 실생활에서 힘을 얻기 시작함을 알게 되고 그 근원 추적에 나선다.
'매노스피어(Manosphere).' 남성계 커뮤니티를 포괄하는 영단어다. 에펨코리아(펨코), 일간베스트(일베) 같은 우리나라의 '남초 커뮤니티'로 번역될 수 있겠다. 베이츠는 신간 '인셀 테러'에서 이 같은 온라인 공간을 '각자 견고한 신념체계, 언어, 세뇌의 형태가 있는 서로 다르지만 연관된 여러 집단의 스펙트럼'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온라인 여성혐오가 어떻게 현실의 폭력이 되었는지를 고찰하고자 직접 이 남성계 커뮤니티에 뛰어든다. 이를 위해 '알렉스'라고 하는 가상의 20대 백인 남성으로 분한다.
알렉스는 1년 동안 온갖 매노스피어를 종횡무진 탐구한다. 여성에 대한 사나운 증오심으로 무장한 '인셀 커뮤니티'가 가장 난폭하다. 강간 합법화와 섹스 재분배를 주장한다. 세미나와 캠프를 통해 성희롱, 스토킹, 성폭력을 가르치는 '픽업 아티스트 커뮤니티', 여성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는 고립주의자들의 '믹타우 커뮤니티', 그리고 사이비 학문과 거짓 통계, 그럴듯하게 들리는 주장으로 반페미니즘을 외치는 '남성권리운동가' 등은 매노스피어의 생태계를 구성한다.
어디 영국만의 일일까. 2017년 국내의 한 자동차 커뮤니티에서 일명 '곰탕집 사건' 이슈가 촉발됐다. 곰탕집에서 남성이 여성을 성추행하여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이 확정된 사건이다. 그럼에도 많은 남성 누리꾼들은 불충분한 증거에도 남성이 범죄자가 됐다며 아직도 '남성 역차별' 혹은 '무고죄 강화'를 주장하는 핵심 사례로 이 사건을 든다. 게다가 일찍이 한국에는 여성가족부 폐지, 군가산점 부활 등을 주장하고 한강에 몸을 던지는 퍼포먼스를 벌이다 사망한 남성인권운동 단체 대표가 있지 않았던가. 책 속에 묘사된 매노스피어는, 그야말로 한국의 남초 커뮤니티의 판박이다.
이런 커뮤니티는 '인셀'들로 득실하다. '인셀(incel·비자발적 순결주의자)'이라고 하면 오늘날 '연애 또는 성적 파트너를 원하지만 구할 수 없다고 스스로 정의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흔히 피해의식과 패배주의로 가득 차 방구석에 처박힌 채 모니터 뒤에 숨어 여성과 온갖 사회적 약자를 향해 조롱과 비난, 혐오 발언을 일삼는 은둔형 외톨이를 상상한다. 하지만 저자의 관찰에 따르면 이들은 블루칼라 노동자부터 일류 사립대학생까지 다양한 사회적·경제적 배경을 가졌다. 평범한 사람도 '인셀'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인셀은 '섹스'에 집착한다. 이른바 '80 대 20' 이론으로, 상위 20%에 속하는 매력적인 남성들이 80%에 달하는 섹스를 독식한다는 거다. 인셀은 여성들로부터 섹스를 거부당한다는 강한 분노에 사로잡혀 있으며 외모가 떨어지는 남성들은 평생 '성적 불만'에 사로잡혀 살아야 한다는 열패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 분노는 또다시 여성으로 향한다.
여성들이 젊었을 땐 매력적인 남성들과 어마어마하게 많은 섹스를 하다가, 나중에는 진짜 사랑하지는 않지만 금전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남자에게 정착한다는 이들의 망상은 2년여 전 국내 남초 커뮤니티를 휩쓴 '퐁퐁남' 서사와 100% 일치한다. '퐁퐁남'은 결혼 전 성적으로 방종하고 매력 있는 여성들이 결혼 대상으로 선택하는, 연애경험이 전무하거나 썩 능숙하지 못하나 번듯한 직장을 가진 남성을 설거지 세제에 비유한 조어다.
매노스피어라는 생태계 속 남성들은 '공생한다'. 저자가 각종 커뮤니티를 '서로 다르지만 연관된 스펙트럼'이라 설명한 이유다. 인셀과 믹타우의 여성에 대한 두려움, 섹스 좌절감 등을 이용하여 픽업아티스트는 돈을 벌고, 남성권리운동가들은 낙담한 남성들의 분노를 활용해 모금을 하거나 정치적 지지를 받는다. 안티페미니즘의 언어를 등에 업고 과거 제1야당의 대표 자리에 올랐던 젊은 정치인 이준석을 보라. 이 같은 공생은 영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현재진행형이다.
'여성혐오'는 분명하게 극단적 테러리즘의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2014년 여성 여섯 명을 살해한 22세 미국 남성 엘리엇 로저는 인셀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살인을 저지르기 전 "여자애들이 나에게 끌리지 않으므로 너희 모두를 응징할 것"이라는 영상을 올렸다. 'N번방'으로 대표되는 텔레그램 성착취는 어떠한가. 그저 할 일 없는 온라인의 루저들이 벌이는 시시껄렁한 일이라 치부하기에는 남초 커뮤니티가 공유하는 '유해한 남성성'의 해악이 너무 크다. 유사한, 아니 똑같은 현상을 겪고 있는 한국 사회가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탐구이자 분석이다.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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