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창업가들 ‘코리안 드림’ 러시...“뭐든 빠르고 기술력 뛰어나”
한국서 제품 생산, 전세계로 수출
기술창업 비자 4년새 2배 급증
우크라이나 출신 러시아 국적의 로만 베르니두브(Roman Vernidub)씨는 2016년 한국에서 ‘코루파마’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한국에서 미용시술용 필러 주사제를 제조해 전 세계 100개 나라로 수출하고 있다. 그는 대학생 시절 처음 한국에 온 뒤 석사, 박사 과정을 밟으며 ‘K뷰티’의 잠재력을 알아봤고, 회사를 설립하게 됐다. 지난해 연매출 260억원을 달성했고, 현재 상장을 추진하고 있다.
외국인이 대표이고, 모든 제품을 수출하다 보니 회사 풍경도 이국적이다. 서울 사무실과 강원도 공장의 직원 110명 중 50명은 외국인이다. 베르니두브씨는 “한국은 뭐든 빠르고, 기술력이 뛰어나다”며 “전 세계에서 한국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다 보니 우리 제품 역시 관심을 많이 받고 있다”고 했다.
그간 ‘외국인 창업 볼모지’로 여겨졌던 한국을 찾는 외국인 창업가들이 늘고 있다. 미국, 싱가포르 등 ‘창업 강국’에서 외국인 창업은 매우 흔한 일이지만 우리나라 산업체의 외국인들은 대부분 3D 업종에 종사하는 저소득 근로자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K컬처’ 열풍이 불고, 우리 대기업들이 전 세계에서 활약하면서 한국을 찾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외국인 창업가들은 국내 고용 창출, 새 판로 개척을 통해 우리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 실리콘밸리 사례처럼 훌륭한 인력 자본 유입은 국가 경쟁력을 키우는 또 다른 축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에서 교육 단말기를 만들어 인도로 수출하는 기업 ‘태그하이브’의 대표는 인도 출신 아가르왈 판카즈(Agarwal Pankaj)씨다. 그는 2004년 삼성전자 장학생으로 한국에 와 삼성전자에서 10여 년간 엔지니어로 일했다. 그러던 중 사내벤처 제도인 ‘C-LAB’을 통해 삼성의 투자를 받고 2017년 회사를 차렸다. 현재 한국 안산에서 교육기기를 만들어 인도 52개 지역 2000개 학교에 납품하는데, 수출액은 연 10억원이다. 판카즈 대표는 “한국은 IT와 교육 강국이라 에듀테크 산업을 선도할 수 있는 국가”라며 “아프리카 수출도 최근 추진 중”이라고 했다.
◇외국인 창업가에 ‘기회의 땅’ 된 한국
한국에서 창업한 외국인의 숫자는 정확히 집계되진 않고 있다. 다만 창업을 했을 경우 기술창업(D-8-4) 비자 발급 현황을 보면, 2018년 발급자는 45명이었는데 2019년 74명, 2020년 72명, 2021년 98명, 작년 110명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기술창업 준비(D-10-2) 비자 역시 2019년 47명에서 지난해 108명으로 4년 새 배 이상 증가했다. 해외 스타트업의 한국법인 설립을 지원하는 ‘K-스타트업 그랜드 챌린지’ 지원팀도 2019년 1677팀에서 지난해 2653팀으로 1000개 가까이 늘었다.
외국인 창업가들은 상당수가 한국 대학교로 유학을 왔거나, 한국 기업에서 일하다가 아이템을 찾아 창업을 결심했다고 한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보부르 압둘라예프(Bobur Abdullaev)씨는 한국의 한 IT 기업에서 일하다가 인공지능(AI)으로 건강, 교통 관련 데이터를 분석하는 스타트업 ‘옥토봇’을 설립했다. 보부르씨는 “한국 기업에서 일하면서 한국 비즈니스 문화를 익힌 후에 내 아이템을 찾아 창업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한국을 찾은 이유에 대해 “K뷰티, K콘텐츠가 전 세계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화장품 등 한국에서 만든 제품을 해외에 수출하기 좋다는 것이다. 멕시코 출신 미구엘 수아레즈(Miguel Suarez)씨는 지난해 우리나라의 화장품 성분 정보 플랫폼 ‘화해’를 남미 버전으로 바꾼 플랫폼 ‘코스메트릭스’를 만들었다. 그는 “브라질 등 남미에서 한국 제품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며 “나는 남미 지역의 까다로운 규제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한국 제품을 소개하고, 판로를 개척하는 데 용이했다”고 말했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 역시 큰 강점이다. 트렌드 변화에 민감하고, 산업 환경이 역동적인 편이다 보니 창업자들이 새로운 아이템을 찾기에 좋은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또 한국에선 창업과 창업 시 각종 지원을 행정 절차가 빠르기 때문에 복잡하지 않다.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한국에서 포장 패키징 소량 제작 회사 ‘패커티브’를 설립한 도미닉 다닝거(Dominik Danninger)씨는 “나는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의 팬”이라며 “행정 절차도 빠르고, 사람들의 일 처리도 빠르다”고 했다.
◇”한국만큼 변화 빠른 나라 없다”
아시아 시장이나 글로벌 시장으로의 진출을 염두에 두고 본국에서만 사업을 하다가 한국에 법인을 설립하는 해외 스타트업들도 늘고 있다. 한국의 시장 변화가 빠르다 보니 ‘테스트베드’로 적합하다는 것이다. 미국, 독일 등 전통적인 선진국의 창업가들도 이를 위해 한국에 들어온다. 독일 푸드테크기업 코랄로도 최근 한국에 법인을 세웠다. 코랄로는 비건(채식주의자)용 생선 대체육 생산 기업으로, 시나 알바네세(Sina Albanese) 대표는 추후 베트남 등 아시아 시장 진출을 염두에 두고 한국에 아시아 첫 법인을 설립했다. 국내 유수 대기업이 있고, 삼성·현대차·LG 등과 협력하고 싶어하는 해외 스타트업 수요도 많아지고 있다.
한국 입장에서도 외국인 창업가들이 국내에 늘어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해외에서 인재가 유입되고, 이들이 건실한 기업을 세워 수출과 고용 창출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기부 관계자는 “해외에서는 외국인 창업가가 세운 기업이 유니콘 기업이 되고, 큰 기업으로 성장하는 경우도 많다”며 “외국인 창업가가 더 늘어나면 우리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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