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층 고개 돌리자... ‘혐오 정치 상징’ 현수막 철거 나섰다
여당에서 먼저 자진 철거 나서
野 “환영하지만 우리 건 팩트”
20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여의도 서강대교 남단 사거리. 국민의힘 당직자들이 ‘대법원장 임명 부결, 이재명 방탄의 마지막 퍼즐’이란 문구가 적힌 자당(自黨) 현수막을 철거했다. 횡단보도 건너편 ‘윤석열 검찰독재 오만과 독선, 폭주를 멈춰라!’라는 더불어민주당의 현수막과 함께 윤중로 벚꽃길 입구를 양분하던 현수막이었다. 국민의힘은 철거된 자리에 ‘국민의 뜻대로 민생 속으로’란 문구의 현수막을 대신 걸었다.
여의도 국회 방향으로 서강대교를 건너자마자 바로 맞닥뜨리는 이곳은 각 당의 현수막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다. 민주당이 ‘독도가 일본땅?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을 걸어 놓으면 국민의힘이 ‘후쿠시마 괴담정치 중단!’으로 맞불을 놓는 식의 ‘말의 전쟁’이 매일 펼쳐졌다. 최근에는 군소 정당들까지 뛰어들어 일대가 더 혼란해졌다.
이날 철거된 국민의힘 현수막 위에는 한 정치 단체의 ‘휘발 영수증 아이폰 비번 이것이 잡범이다’라는 현수막도 걸려 있었다. 문구 중간에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사진이 있다. 사거리부터 국회 정문까지 약 500m 구간에 걸린 11개의 현수막 대부분엔 ‘경제 외교 정치가 폭탄주? 말아먹는 윤석열 탄핵’ 등 과격한 문구가 쓰여 있다.
국회 인근으로 출퇴근을 하는 직장인 정모(32)씨는 “현수막 때문에 매일 아침 출근길이 불쾌하다”며 “버스정류장 양옆에까지 현수막을 둘러쳐 놓으니 버스 승객이 하차할 공간이 좁아져 위험하다. 출근길 승객이 쏟아져 나올 때 넘어진 적도 있다”고 했다.
‘극단 정치의 상징’인 정쟁 현수막에 대한 국민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자 정치권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은 이날 정쟁 현수막 설치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로 확인된 민심을 반영해 정쟁보단 정책을 우선한다는 취지다. 윤재옥 원내대표는 “과도한 현수막 게시로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고 피로하게 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는 생각”이라며 “정쟁보다는 생산적인 메시지를 더 많이 내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국민의힘이 정쟁 현수막 철거에 나선 것은 보궐선거 패배로 확인된 중도층 이반과 이에 따른 총선 위기감 때문이다. 극단 정치의 상징이 여야의 현수막 경쟁이고, 중도층 사이에서도 현수막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여당이 먼저 현수막 철거에 나선 것은 중도층 공략으로 풀이된다. 여당 관계자는 “이전부터 문제의식은 있었지만, ‘저쪽은 거는데 우리만 가만히 있으면 되느냐’는 목소리에 떠밀린 측면이 있었다”며 “이번에 선거 패배로 ‘우리가 먼저 하자’는 결단을 할 계기가 만들어졌다”고 했다. 새로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선출된 김예지 의원이 지도부 회의에서 정쟁 현수막 철거를 제안했다고 한다. ‘대선 공작 진상조사단’ 같은 각종 정쟁 소지가 있는 당내 태스크포스(TF)도 통폐합하거나 정리하기로 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여당의 현수막 철거에 대해 “환영한다”면서도 자신들의 현수막에 대해선 “팩트에 기반했던 것”이라고 했다. 민주당 원내 관계자는 “국민의힘이 이재명 대표를 향한 비난과 정쟁화를 지금부터라도 반성하고 바꾼다는 점에서 환영할 일”이라면서도 “우리 당 현수막 문구는 원래부터 정쟁보다 민생과 경제에 관련된 게 더 많았고, 후쿠시마 오염수 관련 내용 등은 팩트에 기반했던 것”이라고 했다. 민주당이 당장 현수막을 뗄 계획은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한민수 대변인은 ‘국민의힘처럼 정쟁형 현수막을 철거하는 조치가 예정돼 있느냐’는 물음에는 “먼저 현수막 상황을 파악해볼 것”이라고 했다.
민주당 의원들이 있는 단체 채팅방에선 내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초선 오영환 의원이 국민의힘 현수막 철거 기사를 공유하며 ‘우리도 더 겸손하고 중도층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했다. 강성 지지층만 보면 안 된다는 메시지다. 이에 대해 일부 의원들이 공감을 표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수막 오염은 정당들이 작년 말 개정한 옥외광고물법을 악용했기 때문이다. 개정안은 정당 정책이나 정치 현안에 대한 현수막은 지자체 신고·허가 등 설치에 제한이 없도록 규정했다. 자유로운 정당 활동을 보장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정당들이 내거는 현수막은 혐오와 비방 일색이었다. 민주당은 국민의힘을 ‘국민의짐’으로, 국민의힘은 민주당을 ‘더불어돈봉투당’ ‘내로남국(내로남불과 김남국 의원의 합성어)’이라고 했다. 지난 7월 진보당은 전국에 ‘양평고속도로 종점, 누가 변경한 건희?’라는 현수막을 걸었다. 대통령 부인 이름으로 일종의 말장난을 한 것이다. 국민의힘 소속 의원의 불륜 의혹이 나오자 열린민주당은 ‘불륜의힘’ 같은 문구까지 썼다.
게다가 현수막이 난립하면서 운전자 시야를 가리고 행인이 현수막 줄에 다치는 사고까지 일어났다. 올해 1~6월 현수막 관련 사고는 총 8건 발생했다. 3월 서울 노원구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보행자가 현수막 끈에 걸려 머리를 다쳤다.
국회에는 정당 현수막 규제를 위한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총 12건 올라왔다. 여야 모두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는 하고 있다는 얘기다. 다만 입법 우선순위에서는 밀려있다. 법 개정을 기다리지 않고 조례를 개정해 현수막 철거 작업에 나선 지자체도 있다. 인천광역시는 지난 5월 정당 현수막 정비를 위해 조례를 개정했다. 행정안전부는 인천시를 상대로 상위법에 어긋난다며 대법원에 조례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지만 최근 대법원은 “이유가 없다”며 인천시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 자치구 중에서는 최근 송파구가 ‘혐오·비방·모욕 문구의 정당 현수막 금지 조례’를 제정·공포했다.
19일 인천광역시 국감에서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은 “사실 우리 국회가 해야 될 일인데 인천시가 먼저 선도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현수막 철거로 그치지 말고, 혐오감을 주는 언어를 정치에서 배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성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투표는 강성 지지층도 하지만 승패를 가르는 것은 결국 중도층의 선택”이라며 “중도층 지지를 얻으려면 혐오감을 주는 언어와 거리를 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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