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배의 공간과 스타일] [207] 영국의 하얀 말
영국 시골의 먼 언덕에 흰말이 그려져 있는 모습이 간혹 보인다. 석회암으로 덮인 구릉지 표면을 긁어서 하얗게 드러내도록 만든 것이다.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된 전통으로 인근에 살던 부족의 영역 표시, 또는 말의 여신 ‘에포나(Epona)’를 수호신으로 섬겼던 켈트족의 상징으로 해석된다. 영웅이나 신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런던의 서쪽 웨스트베리(Westbury)의 하얀 말도 그중 하나다. 기원에 대해서는 불분명하여 9세기 앵글로 색슨의 왕 알프레드(King Alfred)의 승전 기념이라고도 하지만, 실제로는 18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된다. 길이 52m, 높이 55m의 크기로 그려져 관광 포인트로 역할을 한다. 석회석의 표면은 빗물에 씻겨 얼룩이 생기고, 쉽게 마모가 일어나므로 장기 보존을 위해서 현재는 콘크리트로 마감을 해 놓았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유명한 말은 옥스퍼드의 서남쪽 우핑턴(Uffington)에 있다. 기원전 1380~550년,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 사이의 유적으로 추정된다. ‘용의 언덕(Dragon Hill)’이라 불리는 능선을 따라 110m 길이로 말 모양을 참호처럼 파놓았다. 스케치를 한 듯 추상적 윤곽선은 주둥이와 꼬리가 과장되고 비율이 자유로워 마치 피카소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가디언(The Guardian)지의 표현대로 지난 3000여 년 동안 ‘미니멀아트’의 영감이 되기도 했다.
이 하얀 말들은 어린이 동화를 비롯한 문학작품에도 자주 등장한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아카데미 9개 부문을 석권한 소설 ‘잉글리시 페이션트(English Patient)’에서도 묘사되고 있다. 공중에서 볼 때 전체 윤곽이 가장 뚜렷하게 보이므로, 2차 세계대전 시 독일군의 이정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풀과 덩굴로 덮어서 가리기도 하였다. 20세기부터는 자원봉사자들이 그림을 뒤덮는 주변의 잡초를 제거하여 멀리서도 잘 보일 수 있도록 관리를 하고 있다. 국토 전체가 정원처럼 조경이 잘 되어있는 영국을 여행할 때 시골길에서 마주치는 꿩과 멀찌감치 보이는 언덕의 하얀 말은 특별하고 반가운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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