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관광명소인 천년 된 재래시장 버로우마켓에서 템스 강변을 향해 1-2분 걸으면 버로우야드(Borough Yards)가 나온다. 19세기 철도 물류 거점이라 벽돌로 지어진 옛 창고 건물이 즐비한 곳이다. 최근에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고풍스러운 건축물 외관에 현대적 시설이 자리잡은 쇼핑가로 재탄생했다. 이곳의 옛 창고 건물 중 하나에 지금 ‘서울’이 펼쳐지고 있다.
높은 벽돌 아치가 있는 벽에 12지신의 웅장한 모습이 차례로 영사되어 나타난다. 옆 공간에는 일월오봉도와 고궁 단청과 온갖 현란한 간판이 한데 어우러진 현대 서울의 하이브리드 풍경이 미디어아트로 펼쳐진다. 그 옆 공간에는 정반대로 차분하고 명상적인 미디어아트가 있다. 도시의 불빛이 아른거리고 빗물이 흘러내리는 창문에 시인 김소월·윤동주 등의 한글 시구가 빗방울처럼 함께 흘러내린다.
이들은 프리즈 런던(10월 11일-15일) 기간 중인 지난 13일 개막한 몰입형(immersive) 미디어아트 전시 ‘딜라이트’의 일부다. 빅토리아 시대의 유산인 런던 버로우야드 거대 창고 이곳저곳에 지구 반대편 도시 서울의 역사, 전설, 현재 인상과 정서에 대한 12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한국의 홍경태 작가가 이끄는 팀이 제작했다.
현지 반응은 뜨겁다. 개막 첫 3일간 약 1480장의 티켓이 팔려 시간대별 최대 허용 관객 수의 91%를 달성했다. 몰입형 전시·공연 전문 글로벌 티케팅 플랫폼 ‘피버(fever)’에서 런던 지역 티켓 판매 10위 안에 들기도 했다. 12일 전시 오프닝에 참석한 피버 CEO 이그나시오 바치예르는 “기술적 완성도가 높다”며 만족감을 표했다.
‘어설러 S.’라는 닉네임의 관람객은 피버의 리뷰란에 이렇게 썼다. “다음 공간으로 넘어갈 때마다 더욱 좋은 걸 보게 되는 마법 같은 경험이었다. 주최자 중 한 명이 도깨비 이야기를 설명해 주었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전시작 중 ‘도깨비’는 한국 민간신앙의 여러 도깨비와 신을 현대적으로 형상화해 애니메이션 프로젝션과 조형물 설치로 풀어낸 작품이다.
“도깨비를 비롯해서 이 전시의 한국적인 요소들은 모두 국립민속박물관 정연학 학예연구관님이 도와주시고 감수해 주신 거예요.” 오프닝에서 만난 홍 작가는 단순히 볼거리에 치중하지 않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홍경태 작가는 1998년부터 미디어아트와 공간 연출로 몰입형 체험을 디자인해 온 ㈜디자인실버피쉬의 대표다. 창업 초기부터 삼성전자가 주요 고객이며, SM엔터테인먼트, 나이키 코리아 등과 일해 왔다. 그러나 이번 ‘딜라이트’ 전시는 기업이 의뢰 없이 그가 스스로 기획한 프로젝트다. 코로나19가 계기였다.
“우리 회사가 삼성 프로젝트를 많이 진행하는데 대부분 (CES 같은) 국제행사예요. 코로나로 국제행사가 중지되니 회사의 수익이 확 떨어졌어요. ‘차라리 쉬는 시간으로 생각하고 내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들을 해보자’ 했죠. 그간 회사를 하면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고 많은 것을 배웠으니, 이제 이걸 문화적으로 사회에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팬데믹 중인 2021년에서 서울에서 첫 ‘딜라이트’ 전시를 열었다. 그후 작품을 가감하고 보완해서 해외 전시를 기획했다. 첫 해외 전시 장소로 런던을 택한 것은 그가 런던에서 대학원을 다녔던 때문이다. 그리고 버로우야드의 옛 벽돌 창고를 고른 이유는 “빛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면서 너무 테크놀로지 느낌을 내지 않는 게 좋아서”라고 설명했다.
홍 작가는 다른 몰입형 미디어아트 제작자들과 차별화되는 점으로 “단순히 시각적 스펙터클보다 관람자가 자신의 기억을 반영하고 정서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그런 전시를 지향한다”고 밝혔다. 런던 전시로 관람객들이 다른 문화에 공감하고 이해할 가능성을 보게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전시는 6개월 동안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