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보선 참패가 국민의힘 총선 승리 ‘백신’ 될까

이정민 2023. 10. 21.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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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 칼럼니스트
강서구청장 보궐 선거 참패로 시끌시끌하던 국민의힘이 ‘빠르게’ 안정세를 찾아가는 모양새다. 권력 순응적인 여당 체질 때문인지 겉보기엔 큰 동요가 없어 보인다. 패배 사흘 만에 윤석열 대통령의 “차분하고 지혜롭게 변화 추진” 발언이 나오면서 사실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이긴 하다. 하지만 총선을 불과 6개월 남겨놓고 17%p라는 큰 격차로 패배한 뒤끝이라 당 안팎에선 “이번엔 다를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여의도(국힘)와 용산(대통령실)의 관계 설정, 총선 전략 등을 둘러싼 치열한 갑론을박이 일지 않겠느냐는 예상이 높았다. 강서 패배는 여당이 민심 전달과 대통령실 독주를 견제하지 못한 데 대한 민심의 심판이란 게 대체적 분석이다. 과거 16대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중앙SUNDAY와 인터뷰에서 “집권당이 대통령실만 추종하고 하부조직처럼 기능하니 국민이 분노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 ‘2기 김기현 체제’로 결론 난 여당
백신효과 보려면 치열한 혁신 노력
독선·오만 견제,책임있는 여당 돼야
중도층 경시한 문 정권이 반면교사

선데이 칼럼
그러나 정말 신기하게도 “김기현 체제론 총선 못 치른다”는 아우성이 쏙 들어갔고, “총선 지면 은퇴”로 배수진을 친 김 대표는 사무총장 등 임명직 당직자 8명의 사표를 받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는 ‘능란한’ 솜씨를 발휘했다. 당의 최고 지도부인 대표와 최고위원들은 남고, 실무 당직자들이 보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떠나는 어정쩡한 봉합이 됐다. “정치는 신념을 실천하고 결과를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 막스 베버의 ‘책임 윤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결말이다. 또 ‘영남당’ 이미지를 벗기 위해서라며 친윤 핵심 이철규 사무총장(강원 동해-태백-삼척-정선) 자리에 TK 출신 이만희 의원을 앉혔다. 윤 대통령 후보 시절 수행단장을 지낸 인사다. 이로써 총선을 이끌 대표(울산)-원내대표(대구 달서을)-사무총장(경북 영천시·청도군) 등 핵심 간판이 영남 일색이 됐다. 수도권 의석이 전체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걸 감안하면, 아리송한 인선이다.

김기현 대표가 물러나야 한다는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2기 김기현 체제’가 대안적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 과정이 혁신의 에너지와 역량을 모으는 반전의 계기로 작용했는지가 중요하다. 이번 참패를 혁신의 계기로 삼아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면 된다는 ‘예방주사론’이 먹혀들려면 보선 패배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어떻게 혁신할 것인지에 대한 불꽃 튀는 토론과 처절한 고민이 선행돼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강서 패배는 정치 지형의 변화를 시사한다. 지난 대선의 승패를 갈랐던 중산층·중도·청년층이 모두 이탈해 대선 이전의 지형으로 회귀해버렸다. 보수당이 참패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다. 김기현 대표는 “민심과 괴리되지 않도록 당이 민심 전달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했는데, 레토릭만으로 등 돌린 중도층의 환심을 살 수 있을지 의문이다. 불과 1년 5개월 전 문재인 정권의 몰락이 반면교사다.

문 전 대통령은 40%의 콘크리트 지지와 180석에 육박하는 압도적 국회 의석을 갖고도 정권 연장에 실패했다. 강성 팬덤에 편승한 편 가르기 정치에 대한 중도층의 혐오와 경고를 외면한 결과다. 내로남불, 편 가르기, 진영·이념전쟁에 신물 난 국민은 공정과 정의, 상식과 합리, 통합과 민생 정치로의 변화와 혁신을 기대했다. 그러나 윤석열 정권은 통합과는 거리가 먼, 엘리트 일색의 측근 인사와 부적격 인사를 강행하는 독선을 보였다. 편중 인사, 부실 검증이란 지적에 “과거엔 민변 출신이 도배를 하지 않았나” “전 정권에서 지명된 장관 중 이렇게 훌륭한 사람 봤느냐”고 항변, 불통 이미지를 더했다. 문재인 정부 5년간 34명의 장관급 인사가 야당 동의 없이 임명됐는데 윤석열 정부 1년 5개월 만에 18명이 여야 합의없이 임명되는 ‘신기록’을 세웠다. 그토록 비난했던 청문회 패싱,국회 경시가 문 정부와 닮은꼴이다. 이러니 내로남불이란 비판을 받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죽창가, 토착 왜구 같은 선동적 구호로 반일감정을 자극하고 빈자와 부자, 노동자와 기업주, 의사와 간호사의 틈새를 벌려 정권 유지의 불쏘시개로 썼다. 적폐청산이란 모호한 구호를 내걸고 선악의 이분법적 대립 구도를 만들어 나라를 두 동강 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윤 정부 들어 이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제일 중요한 게 이념” “좌파 이념에 찌든 운동권 패거리 집단” 운운하며 자유민주주의 세력 대 공산 전체주의 세력의 대립 구도로 이념전쟁에 불을 붙이더니 느닷없이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을 놓고는 내전이라도 불사할 기세다. 이준석 전 대표 등 윤심을 거스르는 인사들은 가차없이 쳐냈다. 유승민 전 의원의 대표 출마를 막으려 하루아침에 ‘게임의 룰’도 바꿨다. 완장 찬 친윤 실세들의 목소리만 요란할 뿐 여당은 무기력하고 무능했다. 강서 패배는 독선과 오만을 견제하지 못하고 민생·국민통합과 거꾸로 간 권력 운영에 대한 경고다. ‘낙타의 등골을 부러뜨린 마지막 지푸라기(the last straw)’인 셈이다.

국힘 국회의원은 111명이나 된다. 민주당의 거대 의석 때문에 초라해 보일 뿐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읽는 통찰과 성찰, 진정성과 용기없이 공천과 배지에만 연연한다면 백신을 수십번 맞아도 물백신이 될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이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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