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풍요’ 말하는 지성과 문학의 기억

이후남 2023. 10. 21.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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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양식들
기억의 양식들
김병익 지음
문학과지성사

문학평론가이자, 1970년대 시작한 계간지·출판사 이름처럼 ‘문학과 지성’을 일궈온 저자의 글 모음이다. 평론·산문·칼럼집이 아닌 데서 짐작하듯, 발표한 지면이나 쓰게 된 계기가 다양하다. 어떤 계기든 의례적인 글에 그치는 경우는 없다. 문명과 세태에 대한 비평이 곳곳에 번득인다.

수십 년 전 글도 여럿인데, 독자로선 아무래도 현재와 공명하는 지점을 찾게 된다. 1960년대 “연대감 없는 세대교체는 역사와 전통의 단절”이라고 쓴 대목(‘문단의 세대연대론’에서)은 올초 일간지 대담을 수록한 글의 “젊은 세대에 대해 내가 기대를 하고 좋게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 사회만 아니라 인간에게 필요한 건 관용”이란 대목과 함께 보게 된다. 매국노 이완용에게 손병희 선생이 3·1 독립선언 운동 참여를 권했고 이완용이 이를 사양했다는 이야기의 진위를 궁금해 하며 시작한 2019년의 글 ‘인간 이해의 착잡함’은 같은 해의 다른 글 ‘포용과 배제’와도 겹쳐진다. 최인훈의 문학에 대한 1968년의 글은 2018년 그의 별세 직후 쓴 영결사와 나란히 실렸다.

특히 김수영·최일남·이청준·오규원 등 문학인에 대한 글은 구체적 인연이 담겨 있어 한결 흥미롭게 읽힌다. 책 말미의 ‘책, 그 질긴 인연’은 삶의 궤적을 간추린 글로도 다가온다. 저자는 이렇게 썼다. “책이란, 그리고 그 책 읽기란, ‘인생’이란 진지한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그것의 존재론적 무화(無化)를 깨닫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독자→기자→편집자→저자→역자→발행인, 다시 독자로의 귀환이라는 끈질긴 인연에도 불구하고, 나는 충만했던 것도 아니지만 공허를 벗어난 것도 아니었다.” 기자 시절 인터뷰를 거절당한 박경리 선생에게서 ‘작가의 품위’를 알게 된 경험, 엄혹했던 시절 이런저런 책을 출간하며 검열을 피하기 위해 동원한 방법, 최근의 독서법 등도 이 글에 나온다.

그는 자유 지식인, 즉 “특정 분야에 매달리기보다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종합적인 시선, 포괄적인 이해를 통한 역사적 전망을 지향하는” 지식인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이런 그가 지금 “빛나면서도 번쩍이지 않는” 품위, ‘검소한 풍요’ ‘성장 없는 발전’ ‘경쟁하는 공존’을 말하는 이유를 곱씹게 된다.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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