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 안중근, 한·중·일 평화공존 사상 싹 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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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특강] 26일 하얼빈 의거 114주년
20세기 초 동아시아의 대석학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는 ‘추풍단등곡(秋風斷藤曲’)을 지어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를 찬양했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단단한 등나무를 쪼갰다는 뜻의 제목이다. 찬 기운이 도는 요즘, 10월 26일이 그 의거 날이다. 114년의 세월이 흘렀다.
안중근(1879~1910)은 의거 당시 만 30세였다. 공자는 『논어』에서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고 20세 약관에 열심히 공부하고 30세에 뜻을 세웠다(立志)고 했다. 공자의 기준으로 봐도 안중근은 조숙이 차고 넘치는 인물이다. 앞서 살폈던, 일본제국의 장래를 결정짓는 ‘유수록(幽囚錄)’을 남기고 죽은 일본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도 도쿠가와 막부 타도를 외치다가 29세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근현대사 특강’ 2회, 6월 7일) 요즈음 기준으로는 취업 문제로 고민하는 연령대인데 그들은 국가 대사로 목숨을 바쳤다. ‘유수록’은 섬나라 일본이 구미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 서구의 우수한 기술을 속히 배워 그들보다 먼저 주변국을 차지해야 한다는 침략주의 사상을 담아 본받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이에 반해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은 한·중·일이 함께 사는 길을 찾는 평화공존 사상이다.
동아시아 석학 량치차오, 하얼빈 의거 찬양
이 무렵 약관의 나이에 접어든 안중근은 『독립신문』(1896.4.7 창간)과 신서적들에 다가갔다. 세례를 집전해 준 빌렘 신부의 서재에는 서양 서적들이 가득했다. 안중근은 그 책들을 읽기 위해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24세가 되던 1904년에 서울로 올라와 명동 성당의 뮈텔 신부를 찾아 대학 설립을 요청했다. 뮈텔 신부는 한국에는 아직 대학이 필요치 않다고 말하자 안중근은 천주는 모시되 서양인은 못 믿겠다고 분노했다.
1907년 2월 일제가 대한제국 정부에 씌운 빚 갚기 운동이 대구에서 시작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퍼졌다. 나라가 억울하게 진 빚을 갚는 것은 국민의 의무라고 했다. 의무를 앞세운 국민 탄생, 서구 역사에서도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안중근은 국채보상운동 평안도 진남포 지역 책임자로 뛰었다. 그해 7월에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광무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자 안중근은 해외 무장 투쟁의 길에 나선다. 그는 열차로 부산으로 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원산을 거쳐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곳 대동공보사에 본부를 둔 대한의군(大韓義軍)을 찾았다. 의군은 국군을 뜻하는 의병의 새 명칭이다. 그는 연해주 곳곳에 나와 살던 동포들을 찾아 무장·교육 투쟁을 독려했다. 150여 명의 부대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동양평화론, 국제연맹 탄생 9년 전에 제시
1909년 10월 초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의군 본부는 한국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으로 온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그를 처단하기 위해 특파대를 구성한다. 안중근은 자원하여 특파대대장이 되어 3명의 대원을 지휘하여 10월 26일 오전 하얼빈 철도정거장에서 이토 히로부미 처단에 성공한다. 그가 쥔 브라우닝 권총을 빠져나간 총탄 3발이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과 복부에 명중하고 다른 3발은 그를 수행하던 일본 관헌의 몸에 박히거나 스쳤다. 내가 쏜 저 늙은이가 이토 히로부미가 아닐지 모른다는 순간적 의구심으로 그를 따르던 관헌들을 겨냥했다. 권총을 바닥에 내려놓고 ‘꼬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세 번 외쳤을 때 1발이 남아 있었다.
안중근은 일본 검찰과 경찰로부터 각 10여 차례 신문을 받는다. 일본 정부는 수사 초동 단계에 안중근 형량(극형)을 미리 정해 놓고 관동도독부 법관들을 감독했다. 뤼순 법원은 1910년 2월 4일에 7일 공판 개시를 공고했다. 3일 앞둔 개정 공고는 예가 없다. 법정은 국선 변호사만 허용한다고 하여 변호의 길도 차단했다. 대동공보사 측이 구성한 국제변호인단은 방청석에서 공판을 지켜봐야 했다.
필자는 『안중근 선생 공판기』(1946)를 읽으면서 안중근 연구를 시작했다. 그때 ‘지식인 안중근’을 처음 발견했다. 안중근은 법관들을 향해 이렇게 4번이나 외쳤다. 나는 대한의군 참모 중장으로 적장을 처단한 것이니 나에게 적용할 법은 오로지 1899년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채택한 ‘육전(陸戰) 포로에 관한 법’이다. 당시 이 국제법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2월 14일 1주일 만에 열린 여섯 번째 공판에서 그는 사형 선고를 받는다.
이어서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동양 평화 구상은 다르다고 했다. 법원장은 그것이 무엇이냐고 다그쳤다. 그는 이미 안중근을 흠모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한·중·일 3국이 서양 세력을 막으려면 뤼순에 3국 공동 군단을 세우고 또 공용화폐를 발행하는 은행을 설립해 경제력을 함께 키워야 한다고 했다. 군단 소속의 3국 젊은이들은 서로의 이해를 위해 상대국 언어를 익혀야 한다고 했다. 1919년 미국 지식인들이 윌슨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국제연맹을 탄생시키기 9년 전의 일이다. 공용화폐 발행 착상은 그때도 누구도 하지 못한 것이다. 어찌 극동의 30세 청년의 가슴에 이런 뜨거운 평화 사상이 싹텄을까. 한민족 특유의 평화 DNA라고 하려니 부끄러움이 앞선다.
일본 호세이대학의 마키노 에이지(牧野英二) 교수는 아무래도 안중근이 빌렘 신부 서재에서 프랑스어 번역본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읽은 것 같다고 했다. 마키노 교수는 일본 칸트 철학회 회장을 역임한 칸트 전공 권위자이다. 이 말을 듣고 나의 ‘지식인 안중근’ 코드에 ‘평화공존 사상의 선구’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안중근은 사형 집행 때까지 50여 일간 매일 한두 편의 유묵을 써서 신념을 후세에 남겼다.
동아시아 대 석학 량치차오는 자신이 1910년 창간한 『국풍보(國風報』) 2월 28일 자 제2호 ‘세계기사’ 난에 ‘안중근 사형’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사형 선고를 받고서도 안색이 흔들리지 않고 평시처럼 의기양양하다. 국치를 한 번 씻었으니 기꺼이 죽겠다고 말했다. 오호라 참으로 열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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