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금니를 뺀 날의 저녁[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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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시인이었는데 월급을 타면 서점을 돌며 문예지를 사셨다.
30년이 지나고 보니 나도 매달 문예지 사는 일을 하고 있다.
그렇게 모은 잡지에서 기억하고 싶은 시가 나오면 받아 적었다.
시가 잊히지 않아 시인의 이름도 잊을 수 없는 그런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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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알지 못하는 감각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일들이 일어나서 살 만한 것인가
이빨로 물어뜯는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은 말한다
이를 잘 숨기고 필요할 때 끈질기게 물어뜯으라고
이렇게 부드러운 말 속에
피의 비린 맛이 숨어 있다니
그러나 그들은 늘 자신의 것을 놓치지 않는다
이제는 살고도 죽고도 싶지 않은 나이
오늘도 나는 시장에 간다 뺀 이를 다시 사고 싶어
그러나 내 잇몸에 맞는 것은 없고
구름이 핏빛 솜뭉치로 보인다, 라는 구절을 생각해본다
― 김성규(1977∼)
나의 아버지는 시인이었는데 월급을 타면 서점을 돌며 문예지를 사셨다. 30년이 지나고 보니 나도 매달 문예지 사는 일을 하고 있다. 그렇게 모은 잡지에서 기억하고 싶은 시가 나오면 받아 적었다. 십 년 넘게 옮겨 적은 작품이 수백 편이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들을 다시 헤아렸다. 그랬더니 김성규 시인의 작품이 가장 여러 편 남는다. ‘불길한 새’, ‘두 눈을 감고 노래해도’, ‘잉어 사육’ 같은 시는 십수 년 지난 후에도 생생하다. 시가 잊히지 않아 시인의 이름도 잊을 수 없는 그런 경우다.
1977년 충북 옥천, 금강 근처에서 태어났다는 이 시인은 비참의 대가다. 그는 인간의 존재론적인 비참이나 철학적인 비참이 아니라 실제 비참한 감각을 다룬다. ‘바로 지금 나’의 견딜 수 없는 비참함에 대해 이만큼 정확하게, 아닌 듯 의뭉스럽게, 정곡을 찌르는 듯, 현실과 환상을 절묘하게 섞어가며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이래도 살아야 하나’ 싶은 생각과 ‘이래도 살고 싶다’는 생각 사이에 그의 시는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의 불안감과 ‘어떻게든 살아낸다’의 읊조림 사이에 시인이 있다. 그 사이를 갈팡질팡하는 것이 진짜 인간의 현실 아닌가. 오늘은 시를 겨우 한 편만, 그것도 일부만 소개하게 되어 무척 죄송하지만, 분명히 김성규는 오래 기억할 만한 시인의 이름이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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