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어떻게든 세월은 흐른다
부모세대 빨치산 역사부터
아찔했던 나의 첫 산행까지
산은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
뒷산은 만만하게 오를 수 있다. 찔레순 따먹고 돌배 따먹으며 유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바친 뒷산, 같은 것은 내게 없다. 나의 뒷산은 지리산이었다. 어린아이란 모든 큰 것에 두려움과 경외를 느낀다. 마을 사랑방 노릇을 하던, 장정 두 사람이 안아도 팔이 닿지 않던 동네 초입 팽나무만 해도, 그것은 나무 이상의, 영(靈)이 서린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물며 산허리에 구름 감도는 지리산이라니. 그 구름 위에는 수염 허연 신선이라도 가부좌를 틀고 있을 듯했고, 그리하여 지리산은 무시무시했던 수십년 전의 역사를 거론할 것도 없이 그 크기만으로도 평범한 뒷산일 수 없었다.
소주를 홀짝거리며 우리 뒤를 따라오던 키가 호리호리한 전북대생은 간간이 정아야, 하고 산이 떠나가라 울부짖었다. 전주 어느 약국집 아들이라는, 지금은 이름도 생김새도 잊어버린 그 청년은 아마 그 무렵 혹독한 이별을 경험한 모양이었다. 그는 눈물을 뚝뚝 떨구며 정아야를 외쳤고, 그 소리는 빈 계곡으로 아스라이 멀어졌다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천은사길이 아니라는 것이 점차 분명해졌지만,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다. 불안해하던 아이들은 시간이 흐르자 말을 잃었다. 비를 맞으며, 다시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에 몸을 말리며, 풀을 헤치며, 정아야, 울부짖음을 들으며, 처음에는 공포를 밟아, 나중에는 흰 달빛을 밟아 말없이 걸을 뿐이었다. 1시쯤 노고단을 출발해서 달빛 아래 감자꽃 하얗게 핀 인가, 나중에 알고 보니 남원 반선에 도착한 것은 그날 밤 10시였다.
어린 나이이긴 했지만 트럭에 실려 남원역까지, 그리고 기차로 순천까지 오는 동안 우리 모두 침묵했던 것은 그 기이한 체험이 남긴, 알 수 없는, 생에 대한 묵직한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날 우리는 생의 가장 깊은 바닥을 밟았었다, 고 한다면 너무 과장된 해석일까?
지리산은 반역의 땅, 금단의 땅만은 아니었다. 지리산은 내 유년과 사춘기와 청춘의 날들이 새겨진, 나의 역사였다. 내 마음은 좁고 험하여 많은 것을 담지 못하나 산은 모든 것을 담는다. 지리산이 품고 있는 것은 내 어머니, 아버지의 청춘만이 아니다. 내 부모와 맞서 싸웠던 군경의 서글픈 죽음까지도 지리산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요즘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은 그 아픈 역사조차 잊었다. 그러면 또 어떠한가. 사람도 세상도 변하는 것이다. 산 또한 우리와 함께 늙어간다. 이제 앞산이 된 지리산에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곧 단풍이 찬란하게 물들 테고 그 잎은 또 떨어져 거름이 될 테지. 어떻게든 세월은 흘러가게 마련이다.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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