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10월, 트렌치코트를 입은 형사가 생각나지 않나요[이종산의 장르를 읽다]

기자 2023. 10. 20.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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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슈투더
프리드리히 글라우저 지음|박원영 옮김
레드박스|312쪽|1만2000원

가을은 미스터리가 잘 어울리는 계절이다. 날씨부터 요상하지 않은가. 흐렸다 하면 금방 맑아지고, 추웠다 더웠다, 비도 아무 때나 내린다.

낙엽이 날리는 거리에서 트렌치코트를 입은 형사가 해결해야 하는 사건을 생각하느라 잠시 주변을 잊고 서 있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비도 추적추적 내린다. 가을이 아니면 불가능한 장면이다.

<형사 슈투더>는 1936년에 출간된 형사소설이다. 배경은 스위스의 작은 마을. 형사는 살인 사건의 범인을 쫓는다. 피해자의 죽음에는 여러 의문점이 있고, 형사는 마을 사람들을 탐문하면서 어두운 진실에 점점 가까워진다. 이런 이야기 구조는 너무 흔해서 추리소설의 팬이 아니라도 아주 익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가끔은 이렇게 뻔할 정도로 익숙한 패턴을 가진 클래식한 추리소설이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슈투더는 클래식한 소설의 주인공답게 아주 클래식한 형사 캐릭터다. 그는 백인 남성이며, 술과 담배를 즐기고, 우직하게 사건을 쫓는다. 말과 행동이 무뚝뚝하지만, 사실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기도 하다. 몸집은 큰 편이고, 검은 중절모를 쓰고 다닌다. 슈투더 형사는 싸구려 로맨스와 싸구려 스릴러 소설이라면 질색하는데, 재밌게도 그 두 가지가 소설에서는 꽤 중요하게 등장한다. 아마도 작가는 싸구려 로맨스와 스릴러가 형편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름의 애정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소설은 겉으로 보면 뻔한 구조의 이야기지만, 읽다 보면 독특한 점도 있다. 특히 도드라지는 것이 범죄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다. 이 책 속에서 범죄자는 보통 사람과 구분되는 특별히 악한 존재가 아니다. 그저 범죄를 저질렀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 범죄자도 평범한 사람과 똑같은 한 인간으로 묘사된다.

이 책의 작가 프리드리히 글라우저는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 불화를 겪으며 정신이 피폐해졌는데, 그 시기 폐결핵에 걸려 복용한 모르핀에 중독되어 정신병원 입·퇴원을 반복했다고 한다. 방황하며 외인 부대에서 몇년을 보내기도 하고, 접시 닦이, 광부, 정원사 보조 등의 직업을 전전했다고 하는데, 다양한 일을 하면서 만난 여러 사람이 세상을 보는 작가의 시선을 형성한 것이 아닌가 싶다.

소설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범인으로 의심받는 자는 슈룸프라는 청년이다. 그는 청소년 때 절도로 교화원에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감옥에 들락거렸다. 그러다 마을 묘목장에서 일하게 된 뒤부터는 2년쯤 조용히 살았다. 결혼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결혼을 약속한 여자의 아버지가 숲에서 총을 맞아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죽은 사람은 300프랑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그날 밤 슈룸프가 술집에서 100프랑짜리 지폐를 내고 마을에서 도주했다. 아직 재판이 열리지는 않았지만 사건을 맡은 담당 판사는 슈룸프가 범인이라고 생각한다.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어 유치장에 갇힌 슈룸프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슈투더가 그를 발견해 살려낸다. 형사는 청년과 대화를 나누고 나서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촉’이 온다. 경험 많은 노형사의 직감이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작은 시골 마을에 찾아간 형사 슈투더가 여러 사람을 탐문하며 보여지는 다양한 인간 군상도 이 소설의 묘미다. 마을 사람들은 평범하지만 매우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사람들이란 떨어져서 보면 평범하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모두 독특하고 이상한 면이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한 명씩 돋보기로 관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사실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으로 느낀 부분은 ‘사물들’이다. 로맨스 소설책, 기차, 권총, 총알, 꽃병, 모자, 시계, 굵은 갈색 파커 듀오폴드 만년필. 작가는 사물들을 가져와 공간에 배치하는 솜씨가 뛰어나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형사 슈투더>는 클래식하고 스타일리시한 미스터리 소설이다.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0월에 읽기 딱 좋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읽어도 좋겠지만, 소설에 나온 독특한 비율의 술을 마시고 싶어지기도 한다.

소설의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슈투더가 마시는 술인데, 레시피도 정확하게 나와 있다. 술잔에 설탕을 넣고 뜨거운 물로 반을 채워 흔든 뒤 같은 비율로 코냑, 진, 위스키 순서대로 붓는 것이다. 슈투더는 이 술을 마시고 정신이 혼미해진다.

슈투더는 소설 속에서 말한다. 우리는 모두 미쳐서 머릿속에 새를 키우고 있다고.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닭 농장이 통째로 들어 있기도 하다고 말이다.

<형사 슈투더>는 꽤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미스터리 소설이지만, 싸구려는 아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통찰이 책 곳곳에 반짝인다.

이종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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